무력감의 시대-희망을 살아내는 이들(강남순 교수)

Author
강남순
Date
2016-10-05 10:16
Views
1219
< 무력감의 시대, 희망을 '살아내는 이들' >

1. 케렌 리바크츠 (Karen Lebacqz)는 <불의한 세계에서의 정의(Justice in an Unjust World)>라는 책을, 한 사진작가의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남아프리카의 극도로 참혹한 인종차별의 현장들을 필름에 담아온 데이빗 골드블래트 (David Goldblatt)라는 사진작가가 런던의 한 방송과 가진 인터뷰에 나오는 말이다.

"당신이 아침에 깨어서
숨을 쉬기 위하여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당신은 이미 타협(compromise)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리바크츠는 이어서, 내가 아침에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 내가 즐겨입는 면 블라우스를 입고 있을 때, 이미 나는 거대한 불의의 사슬에 나 자신이 타협하고 가담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이 이 사람만의 것인가. 우리는 종종 거대한 불의의 구조속에서 살아가는 한 개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지 않은가.

2. 백남기 선생의 부당한 죽음 앞에서, 세월호 참사 앞에서, 밀양 송전탑에서 무수한 개인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고, 단식을 하고, 연대하며 변화를 모색하지만, 거대한 정치권력앞에서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반복되는 무력감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좌절감과 씨름을 해야하는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 뿐인가. 다국적 기업의 구조속에서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노동 착취의 결과물들을 먹고, 입고,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속에서, 한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리바크츠의 고백처럼,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숨쉬기 위하여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 순간, 우리는 거대한 불의의 구조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력감의 시대'에 우리가 부여잡고 있을 희망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3. 얼마전 어느 분으로부터 페북 메시지를 받았다. 나의 페친이 아니기에 필터링된 메시지에 들어와 있어서 아마 한참 후에나 내가 그 메시지를 열어본 것 같다. 페친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이렇게 메시지를 주신 분들만 요청승인을 하고 있다. 이 분이 페친신청을 하며 자신이 나의 책을 구입하고 동영상 강연들을 모두 들으면서 나와 페친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며, 다음과 같은 자기 소개를 하셨다:

"부모로부터 학대에 노출되어 원가정속 양육이 불가한 아이들 여섯명과 함께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엄마이자 늦깍이 대학원생"... . .

무심히 열었던 이 분의 긴 메시지를 읽어내려가면서, 내 마음속에 '아...'하는 뭉클함이 생겼다. 많은 이들이 다충적 무력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러한 '함께-살아감'의 삶을 살아내는 이들이 이 세계 구석 구석에 있다는 사실을 이 메시지는 내게 분명히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4. 거대한 구조속에서 한 개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냉소와 무력감의 시대를 넘어서서 희망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은, 사실상 이렇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 '희망 자체를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희망을 '고정된 목표'로가 아니라, 절망과 무력감 한 가운데에서 '살아내는 것'--여기에 우리의 희망의 터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의 근거란 '승리의 보장'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정의로운 세계, 평등과 평화를 이루는 세계에 대한 씨름하는 그 과정 한 가운데에 있다. 대학로에서, 시청과 광화문에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연민과 연대의 몸짓을 하는 이들-- 그리고 나의 페친처럼 '함께-살아감'의 의미를 '살아내는 이들'-- 이러한 이들의 몸짓 자체가 사실상 우리의 희망의 근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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