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깊은 그림자

Author
이상헌
Date
2016-10-05 10:21
Views
1083
덧붙일 게 없는, 그 자체로 가슴에 파고드는 글이네요.
"이런 믿음은 간단히 깨졌다. 1988년에 브루스와 이스트리트 밴드는 인권 신장을 위한 콘서트에 참석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중 한 나라가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였다. 그곳은 당연히 ‘완전히 까만 얼굴’이 백색 관객 속에 점처럼 꽂혀 있는 미국 콘서트장이 아니었다. 거대한 스타디움 전체가 까만 얼굴로 가득 찼다. 그렇게 완벽한 암흑 속에서 브루스는 비로소 알게 된다. “크라렌스가 이제껏 어떤 느낌으로 살았는지.” 우정을 싹틔운 지 무려 20년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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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삶터 일터]차별의 깊은 그림자

내가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남들도 그러리라 여기면서 어물쩍 넘기지만, 오늘처럼 온갖 차별의 해악을 설파하는 ‘반차별의 전도사’ 노릇을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오면 창문 밖을 한참 바라보게 된다. 나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들을 단호한 언어에 담아 말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후유증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남들 좋다는 대학에 다녔고 게다가 남자였으니, 차별이 뭔지를 몰랐다. 그런 온실을 떠나 외국에서 밥벌이하다 보니, 차별의 설움이 목청까지 차오르는 일들이 생겼다. 물론 하찮은 언어능력 때문에 남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 상대가 잘 들으라고 소리 높인 것을 나는 짐짓 차별이라고 화를 내는 ‘부작용’이 더러 있긴 하지만, 차별은 이곳의 공고한 일상이다. 하지만 고백건대, 내가 겪은 차별은 깃털보다 가볍다.

차별을 다루기 힘든 까닭은 뻔뻔하고 교활하기 때문이다. 주먹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는 제 주먹이 하는 일은 안다. 하지만 차별하는 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왜 차별하느냐며 소리치고 울부짖어야 그제서야 알게 되는데, 이런 ‘인지’의 순간에도 가장 흔한 답은 “내가 언제 차별했다고 그래?”다. 나는 이런 대답의 뻔뻔함을 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똑같은 뻔뻔함을 행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내가 누구보다도 차별의 피폐함을 아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존재론적인 부정에만 슬그머니 기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차별에 대해 불평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가끔 거칠다는 생각이 들고, “저들이 말하는 품새”가 점잖지 않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이 불안하다. 또, 예컨대 여성차별을 비난하는 ‘올곧은’ 발언을 할 때마다 나는 아내 얼굴을 힐끗 보게 된다. 결혼생활이 20년을 넘었지만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말과 행실의 간극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고백건대, 일터에서 여성, 소수인종, 성적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의 아픔을 정확히 헤아릴 재간은 내게 없다. 나의 계량기는 늘 형편없이 과소평가다. 계량기를 고칠 방도를 아직 찾질 못했으니, 이제 나는 상습적인 과소평가를 경계하며 살 뿐이다.

이렇게 진퇴양난일 때마다 나는 이스트리트 밴드의 리더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떠올린다. 올봄, 그는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성소수자를 대놓고 차별하자는 법안이 통과되자, 그는 콘서트를 취소하겠다고 선언했다. 록 가수에게 생명과 같은 콘서트지만, 그는 편견과 차별에 대항해 같이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콘서트 취소는 노래를 부르지 않음으로써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라는 말도 남겼다. 얄미울 정도로 멋있다.

브루스와 그의 밴드를 세상에 널리 알린 앨범은 ‘달려야 하는 인생’(Born to Run)이다. 1975년에 나온 이 앨범 재킷의 표지에는 6명의 밴드멤버가 아니라 단 두 명만이 나온다. 한명은 브루스고, 다른 한명은 크라렌스 크레몬스다. 크라렌스는 록 밴드에는 드물었던 색소폰 연주자이고, 그보다 더 드문 흑인이다. 그는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어가면서 색소폰을 불고 있고, 그 옆에 선 브루스는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지켜보고 있다. 흑백의 조화와 평화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흑인 인권운동이 거세었던 1960년대 성과 덕분에 흑인의 처지가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차별의 일상은 여전히 강고했던 때였다. 그저 버스 타고 가게 다니기가 편안해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백인이 흑인에게 기대고 있는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재킷 표지는 브루스의 작품이었다. 노래처럼 사진을 통해서도 하고 싶은 얘기, 차별 없는 우정과 연대를 표지에 담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브루스가 그 이후 고단하게 지켜온 메시지이고, 40년 묵은 우정의 시작이었다. 크라렌스는 키가 2m에 육박하고 몸무게도 120㎏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첫 만남 이후 둘은 짝꿍이 되어 “섹스 다음으로 가장 열정적인” 무언가를 서로 나누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고 다녔다. 크라렌스는 밴드에서도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브루스는 이렇게 썼다. “크라렌스가 죽었다고 우리 밴드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두 죽게 되면 그때 같이 떠날 것이다.” 차별 없는 연대와 우정의 궁극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출간된 자서전에서 브루스는 예상치 못한 고백을 했다고 한다. 브루스의 절대 절친이었던 크라렌스는 사실 백인들만 가득한 밴드에서 살아가느라고 힘들어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외로웠고, 우리가 아무리 가깝다고 한들, 나는 백인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현실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신의 사랑조차도, 인종의 흔적을 지우질 못했다.” 브루스는 세상의 어느 백인보다도 크라렌스를 존중했지만, 갈등은 계속되었고 밴드도 때때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브루스는 인내했다. 아니, 인내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간단히 깨졌다. 1988년에 브루스와 이스트리트 밴드는 인권 신장을 위한 콘서트에 참석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중 한 나라가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였다. 그곳은 당연히 ‘완전히 까만 얼굴’이 백색 관객 속에 점처럼 꽂혀 있는 미국 콘서트장이 아니었다. 거대한 스타디움 전체가 까만 얼굴로 가득 찼다. 그렇게 완벽한 암흑 속에서 브루스는 비로소 알게 된다. “크라렌스가 이제껏 어떤 느낌으로 살았는지.” 우정을 싹틔운 지 무려 20년 후의 일이다.

차별당해 보지 않은 자가 차별의 고통을 알기란 힘들다. 좀 안다는, 그리고 할 만큼 했다는 미망이, 차별의 그림자를 길고 깊게 한다. 차별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많아야 아주 서서히 사라지는 놈이다. 싫은 소리도 옆에서 해야 한다. 지레 이해했다고 앞에 서서 목청 높여 말하는 순간, 그것은 훈계가 되고 때때로 혐오에게 보내는 초대장이 된다. 차별은 악착같은 놈이다. 우리가 차별이 없다고 외치는 순간, 우리 머리 위로 차별이라는 놈은 고개를 내밀며 뱀의 혀처럼 날름거린다. 브루스는 이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크라렌스가 세상을 떠난 뒤 브루스는 모든 콘서트에서 그를 회상하는 노래를 한다. 그때마다 브루스는 아프게 기억할 것이다. 차별의 깊은 그림자를. 그리고, 나는 고장난 계량기를 다시 만지작거리며 오늘 브루스로부터 배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92130005&code=990100#csidx636b594d5e0876d9d39e011c5bc96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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