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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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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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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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8일 / 성령강림절 열한 번째 주일
자유 5

진리 · 영 · 자유
요한 8:31-32 고린도후서 3:17 갈라디아 5:1

곽건용 목사

31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그대들은 참으로 나의 제자들입니다. 32 그리고 그대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복음 8:31-32)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린도후서 3:17).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디아 5:1).

인류 역사는 자유가 확대되어온 역사

오늘은 요한복음과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에서 각각 말씀을 읽었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성서를 해석하는 일이지만 이런 구절들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을 하면 오히려 군더더기를 덧붙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들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늘은 ‘자유’를 주제로 한 시리즈 설교 다섯 번째로서 이 주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설교가 되겠습니다. 이 주제를 다루려 맘먹었을 때 생각했던 것을 다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기회를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음에 할 예정인 시리즈 ‘나는 이런 예수가 싫다!’를 빨리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이 제목을 보고 ‘제목이 그럴 뿐이지 결국은 이러저러해서 예수가 좋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텐데 그건 오해입니다.

예수님도 시대의 자식이었으므로 시대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우리가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했으니 나도 똑같이 해야지.’라는 생각은 때로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실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분이 아니었고 또 때로는 그 시대를 뛰어넘지 못했으므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거 보라니까, 예수님이라고 해서 다 옳은 건 아니라니까.’ 하고 예수 믿기를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그 빈자리를 우리가 채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실수도 잘못도 없는 완벽한 사람(그런 사람이 있겠냐마는)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신, 그분이 지향하셨던 하느님나라의 모습, 거기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어떤 복음정신으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지향성 등 때문에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지요.

인류 역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자유를 누리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때로는 뒷걸음쳤을 때도 있지만 길게 보면 인류 역사는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자유’는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 온 가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죽하면 ‘자유당’이니 ‘자유한국당’이니 ‘자유총연맹’ 등 ‘자유’와 상관이 없거나 정반대의 길을 걷는 집단들까지 ‘자유’를 앞에 내세웠겠습니까.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서구 사상의 뿌리는 헬레니즘와 헤브라이즘이라고 말들 합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로마의 사상이고 헤브라이즘은 구약성서의 사상입니다. 그리스 사상에서 자유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다양한 얘기와 주장들을 쏟아냈지만 의지의 자유, 선택의 자유, 존재의 자유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의지의 자유는 자신의 삶을 운명이나 타인, 또는 신들의 의지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리킵니다. 선택의 자유는 의지의 자유를 실현할 수단을 선택할 자유를 가리키고, 존재의 자유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자유를 가리킨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족하는 삶’을 얘기했습니다. 자신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지요. 이런 생각은 히브리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리스적인 생각에 가깝습니다. 자족, 또는 스스로 만족하는 삶은 나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다양한 조건들을 다 떼어 내버리면 남은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만족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를 뒤덮고 있는 온갖 부산물들, 그것이 재산이 됐든 지식이 됐든 명예가 됐든 뭐가 됐든 나를 장식하거나 더럽히는 온갖 부산물들에 일희일비 하지만 그것들을 다 떼버리고 남은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라는 겁니다. 그 ‘나’에 만족하고 그 ‘나’가 온갖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족하는 삶이고 존재의 자유라는 말입니다.

자유에 대한 히브리적 생각

헤브라이즘은 뭐든지 그리스 사상처럼 명제 형식으로 정리하지 않고 이야기와 사건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자유는 이러저러하다.’라고 설명하지 않고 그게 뭔지를 보여주는 사건을 통해서 표현합니다. 그런데 ‘자유’라는 가치에 대한 헤브라이즘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야훼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수백 년간 이어져온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노예들이 집단적으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된 사건입니다. 몇 번이나 얘기했듯이 왜 사람들이, 구약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경전으로 믿는 사람들도, 심지어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조차 출애굽 사건이 갖고 있는 엄청난 중요성에 대해 별 말이 없는지, 거기에 주목하지 않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방된 히브리 노예들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몇몇 노예 개인이 주인의 시혜를 얻어서 해방된 경우는 있었지만 노예가 집단적으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린 전례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 중 하나였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해방된 경험과 자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노예가. 자기 아버지도 노예였고 할아버지도 노예였으며 그 아버지, 그 할아버지도 노예였기에 노예 아닌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해방되어 자유로워졌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사람이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들이 광야에서 40년이란 세월을 보낸 까닭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이 얻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엇을 위한 자유’를 깨닫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를 읽어보면 40년 세월이 그들로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하긴 그로부터 3천 2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인류가 그걸 깨달았는지는 지극히 의문입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겪은 많은 일들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 깨닫는 과정에서 행했던 시행착오였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두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이상화하고 판타지로 만들어서 그리로 돌아가려는 욕망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광야에서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마실 물이 없어 목이 타들어가자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때는 고기 가마 옆에서 배불리 먹었다면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노예였을 때 고기를 배불리 먹었던 일은 없습니다. 지금 삶이 힘들고 고달프니까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나마 가까스로 연명했던 때를 이상적으로 그렸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부재를 견뎌라!

둘째는 자기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물한 야훼 하느님의 부재를 당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야훼 하느님의 대리자 모세가 야훼에게 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동안에 황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게 자기들을 해방시킨 신이고 앞으로 자기들을 이끌고 갈 신이라면서 광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히브리인들이 스스로 쟁취한 자유가 아니라 야훼에 의해 주어진 자유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됐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은 야훼가 주도했습니다. 게더가 야훼는 광야에서 이들을 이끌었습니다. 배고프다고 하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줬고 목마르고 하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해서 갈증을 채워줬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하겠냐 말입니다. 이들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하느님 없이 살 줄 알아야 했습니다. 야훼의 대리자 모세가 산에 올라간 것은 계명을 받을 목적이기도 했지만 이들이 하느님 없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게 되는 계기도 됐습니다. 이들은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황금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든 것도 문제였지만 이들이 하느님 없이 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사실 이들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도 하느님이 없는 빈자리를 그것으로라도 채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아기는 웁니다.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데서 독립해가는 과정입니다. 언제 어떻게 독립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독립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상당히 늦게까지 누군가에게 의존하다가 독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빠르고 늦음과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은 언젠가는 독립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중에도 하느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나가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 바라시는데 그걸 하지 못해서 매사에 하느님을 의지하려 하는 사람 말입니다. ‘모든 걸 하느님께 맡겼다.’는 말을 자랑삼아 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훌륭한 신앙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과 ‘의존’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한 뜻과 정의로운 다스림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지 결국은 하느님의 선하고 정의로운 뜻이 이루어짐을 믿는 겁니다. 반면 하느님은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실천해야 할 것을 하느님이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느님에게 미루는 겁니다. 이는 의지의 자유를 포기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은 하느님을 의존하는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의존하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거기 머물러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의존하는 신앙도 신뢰하는 신앙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 변화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교회 다닌 기간이 길다고 해서 의존하는 신앙이 저절로 신뢰하는 신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의존하는 신앙인에서 신뢰하는 신앙인으로 바뀌려면 현재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정직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의존하는 신앙인지 신뢰하는 신앙인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만일 의존하는 신앙이라면 얼마나 그런지, 신뢰하는 신앙이라면 얼마나 그런지를 정직하게 판단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글자가 사라지고 마음이 느껴지기까지

자신이 의존하는 신앙에 머물러 있다든지 그런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계명에 ‘집착’할 필요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내게 계명을 주셨고 그걸 지키기는 원하신다고 믿으십시오. 물론 계명을 지킨다고 할 때 계명이 주어졌을 때의 상황이나 맥락을 따지지 않고, 그때와 현재의 사회문화적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 무조건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계명을 지키되 생각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성서에 전해지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해석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글자 그대로 행하겠다는 문자주의적 신앙은 해석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계명을 지킬 생각이라면 그것을 해석하는 일이 자의적인 왜곡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집착하다시피 열심히 계명을 지키려 애쓰다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계명의 글자가 점점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계명에 집착하다보면 역설적으로 그 계명의 문자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사라지면서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계명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하라는 걸까? 어떻게 해야 이 계명을 잘 지킬 수 있을까?’에 집착하다보면 ‘하느님은 왜 이 계명을 주셨을까? 이 계명을 주셨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슨 심정으로 나에게 이 계명을 주셨을까?’에 내 마음이 집중되면서 하느님의 마음과 만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마음이 느껴집니다. 말과 글자로 빼곡히 가득 찼던 하느님이 점점 말이 없어지고 침묵합니다. 하느님은 텅 빔이 되고 공(emptiness)이 됩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텅 빈 충만’으로 느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존재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온갖 조건들이 벗겨집니다. 그런 조건들이 사라진 다음의 내가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존재의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경지에 들면 내가 뭘 알고 뭘 모른다는 것이, 내가 어떤 명예를 갖고 있다는 것이, 심지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이 추호도 중요하지 않게 여겨집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로써 ‘자유’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나는 이런 예수가 싫다!’ 주제의 시리즈 설교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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