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6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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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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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6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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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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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 성령강림절 둘째 주일 / 아버지주일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가 5:1-13

곽건용 목사

1 그들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으로 갔다. 2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곧 악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와 만났다. 3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4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5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서 7 큰소리로 외쳤다.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고 애원합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8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0 그리고는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11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귀신들이 예수께 간청하였다. "우리를 돼지들에게로 보내셔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13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악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마가 5:1-13).

가짜뉴스의 역사

요즘 고국의 큰 이슈 중 하나가 ‘가짜뉴스’입니다. 처음에는 ‘이걸 누가 믿을까…….’ 싶은 가짜뉴스들이 돌아다니더니 그것도 이제는 진화해서 상당히 그럴듯하게 꾸민 뉴스들이 돌아다닙니다. 이들을 주로 카톡을 통해 유포되는데 한 조사에 의하면 그것을 받는 사람들 중에 절반 정도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토록 교육수준이 높고 잘 사는 나라 시민들이 전혀 상식적이지 않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거짓말이란 걸 알 수 있는 얘기들을 사실로 믿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와 신학교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중세교회(중세교회를 ‘가톨릭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개신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는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중세교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들이 바늘 끝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춤을 출 수 있는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 얘기를 들어본 분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이처럼 무의미한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겁니다. 십중팔구는 개신교회에서 만들어냈음직한 이 얘기는 가짜뉴스라고 합니다. 이 얘기는 중세시대 최고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작 『신학대전』에 나오는 ‘여러 명의 천사가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얘기하고 합니다. 이 주장도 사실여부를 확인해봐야겠지만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또 있습니다. 이 역시 중세교회 신학자들 간에 파리가 ‘성수’(세례 때 사용하는 물)에 빠지면 파리가 거룩해지는, 아니면 성수가 더럽혀지는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얘기도 오랫동안 떠돌아다닙니다. 이 역시 사실 여부 확인을 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 중에 사실로 확인된 얘기도 있습니다. 사탄도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두고 초대교회 교부들이 논쟁을 벌였다는 얘기도 많이들 하는데 이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구원을 받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의 구원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가 되니 이것이 논쟁거리가 안 된다고 볼 수 없고 실제로 논쟁거리였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 간에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왜 귀신의 이름이 궁금했을까?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5장의 ‘군대귀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얘기는 전에도 여러 번 읽고 설교한 적이 있지만 오늘 또 읽은 까닭은 귀신에게 예수님이 하신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한 마디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은 귀신의 이름이 궁금했을까요? 한 사람을 무덤 사이에서 살게 했고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어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을 돌아다니면서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게 했던 귀신의 이름이 왜 궁금했을까요?

저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복음서는 상당히 중요한 ‘사람’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뭘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부자 청년의 이름을 모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손으로 만져서 열두 해 동안 앓던 혈루병을 고친 여인의 이름도 모릅니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빌다가 예수님에게서 자녀에게 줄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고 개들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느냐는 기상천외한 발언을 했던 이방 여인의 이름도 우리는 모릅니다. 누구도 이들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어떤 복음서도 이들의 이름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치유의 힘이 빠져나가서 열두 해 앓던 여인의 하혈증이 낳았는지 느꼈으면서도 왜 그녀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은 개 취급을 당했지만 굽히지 않고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져 당신을 민망하게 만든 여인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굳이, 하필 예수님은 이 귀신의 이름이 궁금했는가 말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우연히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해서 하루 만에 끝까지 읽은 책이 있는데 저는 그 책에서 오랫동안 품어온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 책은 정신과 의사 정혜신 씨가 쓴 <당신이 옳다>라는 책입니다. 사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오랫동안 제게 흥미로운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금요독서모임에서 정신과 의사 스캇 팩의 <거짓의 사람들>을 읽고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정신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두 책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스캇 팩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자신이 정신과 의사로서 오랫동안 믿지 않던 ‘영혼’과 ‘영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래서 이 책을 썼다고 적었습니다. 영이니 영의 세계니 하는 것들은 정신의학 세계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생각입니다. 이는 이미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자신의 명성과 경력을 단숨에 추락시킬 수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책을 썼습니다. 한편 정혜신 씨는 정신과 의사로 오랫동안 교육과 훈련을 받고 환자를 치료해왔고 그래서 자신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옳다고 인정받는 치료방법, 주로 증상을 없애주는 약물로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에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그녀는 약물이 대세가 된 후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된 치료방법인 ‘상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

그녀가 이렇게 중대한 방향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5년 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그녀는 참변이 벌어지자 활동지역을 안산으로 옮겨서 유가족과 생존학생들 및 생존학생의 가족의 마음을 돌보았습니다. 그녀는 그 전에도 고문 생존자들과 노동현장에서 겪은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병든 사람들을 많이 돌본 의사로 유명하지만 결정적으로 세월호 참사 후에 트라우마 환자를 치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담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저는 책 뒷면에 쓰인 추천사를 믿지 않습니다. 주례사처럼 칭찬 일색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주례사 추천사 중에 대표적으로 흔한 말은 ‘한 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놓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 문장을 한 번쯤을 봤을 겁니다.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거니와 제가 추천사를 부탁받는 경우에도 그 말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이 옳다>를 그렇게 읽었습니다. 하루 온종일이 걸려서 다 읽고 나서야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눈물도 여러 번 흘렸습니다. 추하기만 한 세상에 아직도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같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의학드라마를 보면 심장의 박동이 정지하면 CPR이라고 부르는 심폐소생술을 씁니다. 손으로 심장 부위를 강하게 압박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법입니다. 정혜신 씨는 이 책에서 ‘심리적 CPR’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심장박동이 정지된 것처럼 마음의 박동이 정지됐을 때는 긴급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게 ‘공감’(empathy)이라는 겁니다. 이 책에는 ‘이 얘기가 정말 사실일까? 혹시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양념을 첨가한 게 아닐까?’ 싶은 얘기들도 있습니다. 제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면서 읽었는데 읽다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더군요.

한 초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 얘기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때렸다는 담임교사의 전화를 받고 엄마가 아이와 마주앉아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때리긴 했지만 그 아이가 먼저 말로 시비를 걸어서 때렸고 담임교사에게 야단을 맞았고 자기가 잘못한 것은 인정한다고 하면서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어찌 됐든 먼저 폭력을 쓴 것은 잘못인데 그걸 알았으니 됐다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서럽게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기만 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줘야지. 그 애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서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그러고는 엉엉 울더랍니다.

그제야 엄마는 아이의 마음이 어땠는지, 얼마나 속상했는지, 왜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친구를 때리기 전에 마음이 어땠는지는 묻지 않았고, 이미 한 번 야단을 맞고 온 아이에게 괜찮은지 묻기 전에 왜 그랬냐고 따져 물었던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기만 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줘야지.”라는 말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태극기 노인의 이야기

우리는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한 사람에게 어떻게 공감할 수 있나, 본인에게 그걸 알려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겠냐고 걱정하는데 정혜신 씨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공감할 지점은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아니라 ‘마음’ 곧 ‘감정’이라는 겁니다. 생각을 바꾸게 하고 행동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 감정을 터치하는 것이 그를 치유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는 곳에 이른바 ‘태극기 노인들’이 와서 서명대를 뒤집어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소동이 끝나고 정혜신 씨가 행패를 부리던 한 노인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녀는 그 노인에게 왜 그랬냐고 묻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라는 물음으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오래전에 작고한 아내 얘기로 이어졌고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들과 며느리 얘기로 옮겨갔으며 그러다 보니 정혜신 씨도 눈물이 나더랍니다. 한참 만에 노인 입에서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들에게 욕한 건 좀 부끄럽지.”라고 말하더랍니다. 이에 정혜신 씨는 “그럼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과를 받으려 한 얘기가 아니었는데도 노인은 사과를 하더랍니다. 이 일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소동에 관한 얘기 그 자체만으로는 소동에 관한 진짜 얘기를 할 수 없다. 싸우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방금 전에 자신이 벌였던 소란과 소동을 성찰하기 위해서 노인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른 이야기란 바로 ‘나’의 이야기, 자기 존재에 관한 이야기다.”

공감이 낳은 기적

그녀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자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던 이야기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참사 초기에 많은 심리치료 전문가들이 현장에 왔지만 이내 거의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대신 “집에만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무작정 왔다.”는 자원 활동가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고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며 울면서 탄식하는 자원 활동가들은 피해자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고,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슬픔과 분노, 무력감을 호소하면서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답니다. 그녀는 이런 자원 활동가들의 마음과 태도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소위 심리전문가들은 오래지 않아 모두 현장을 떠났는데 심리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손잡고 함께 울어준 것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됐을 뿐 아니라 그들을 실질적으로 치유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왜 예수님이 귀신에게 이름을 물었느냐는 제 오래 된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고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귀신’은 일반명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이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인 그 귀신의 이름이, ‘군대’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그 귀신의 정체성을 알고 싶었던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원을 얻든 심판을 받든 귀신이라는 일반명사가 구원이든 심판이든 받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자인 ‘군대’가 구원을 받든 심판을 받는 하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이 귀신에게 이름을 물음으로써 집단이 아닌 개별자로서의 그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귀신까지도 집단이 아니라 개별자로 대하셨다는 겁니다.

오늘은 아버지주일입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아버지를 주제로 설교하지 않았지만 오늘 얘기는 아버지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전에 ‘사람’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아버지도 아저지라는 직책 이전에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절대적으로 공감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대 때문에 버거워하는 인간입니다. 그 기대를 버려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 기대와 더불어 아버지의 존재에, 인격에, 그리고 아버지의 감정에 공감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앞으로 한두 주일 더 관련된 얘기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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