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9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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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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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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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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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9일 / 성령강림주일

하느님의 영이 거하는 곳
사도행전 2:1-13

곽건용 목사

1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2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6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7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9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11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12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13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사도행전 2:1-13).

성령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대로 오순절이 되어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지요. 그들이 생전 모르던 언어로 말했다니 말입니다. 이 사건을 흔히 교회의 탄생으로 표현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교회가 생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강림의 사건은 이전 역사 없이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지듯 벌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긴 역사가 있습니다. 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성령강림 사건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역사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작년에 제가 한국 방문하는 동안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해준 김동문 목사님을 기억할 겁니다. 김 목사님은 중동지역에 오래 거주했기에 이슬람 문화와 종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김 목사님이 이번에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이란 책을 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그 동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고 따로따로 알고 있던 일들이 사실은 서로 관련되어 있음도 알게 됐습니다.

이집트에는 거대한 신전의 유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카르낙 신전이 대표적입니다. 이 신전들은 그 옛날에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신전을 지었을까 싶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납니다. 사진 몇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을 때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신전들을 눈으로 봤을 겁니다. 이 신전들은 건물의 규모만 엄청났던 게 아닙니다. 거기에 속한 제사장들은 특권층 중에서도 최고위층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 인구의 2%가 넘는 10만 명이 신전 소유의 노예였다고 합니다. 카르낙 신전 하나만도 433곳의 과수원, 42만 마리의 가축, 65곳의 마을, 83척의 배, 46곳의 작업장, 수십만 평의 농장, 8천 명이 넘는 일꾼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사장들은 최고위층이면서 최고의 부유층이었던 겁니다(김동문,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서> 82쪽).

히브리 노예들에게 신전이란?

이런 상황에서 살던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와서 광야를 유랑했습니다. 이 일을 전하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많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면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 중에는 흥미로운 일들이 많습니다. 간간이 등장하는 계명들도 그것이 주어진 이유와 목적을 살펴가며 읽으면 관심을 끌만한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적어도 읽는데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단단히 맘을 먹고 구약을 읽을 작정으로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레위기에 이르면 너무 지루해서 더 읽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 ‘이 사람은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구약을 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레위기가 지루해서 못 읽을 사람은 거기에 도달하기 전 출애굽기 25장에서 이미 지루해서 견디지 못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레위기가 지겨워 못 읽겠다는 사람이 출애굽기 25장 이하를 견뎠을 리 없습니다. 거기부터 마지막 40장까지는 죄다 성막 짓는 데 관한 얘기입니다. 천막의 길이와 너비는 어때야 하고 어떤 천과 실을 써야 하는지 등,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얘기들이지요. 이 대목은 레위기보다 더 지루하면 지루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제가 궁금한 점은 왜 이토록 지루한 얘기기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토록 상세하게 적은 걸 보면 성서 기록자들은 성막이란 것을 중요하게 여긴 모양인데 대체 왜 그랬느냐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루한 내용을 상세하게 전한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성막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이 현존하는 방식

보다시피 성막은 카르낙 신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합니다. 너그럽게 봐줘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긴 유랑하는 처지였으므로 성막을 화려하게 만들 수도 없었을 겁니다. 건축 재료도 마땅치 않았을 터이고 사람들이 메고 다녀야 했으니 크기와 무게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랑하는 사람들에게 성막을 만들라는 명령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굳이 필요했다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에 제대로 만들면 될 텐데 왜 굳이 하느님은 열악한 조건인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라고 했을까요?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막이든 신전이든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거기에 신이 현존한다고(divine presence) 믿기 때문입니다. 신이 현존하는 장소가 신전입니다. 신의 현존의 상징으로 신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모셔놓은 곳이 신전입니다. 야훼는 신상 만드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성막에는 야훼의 신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 역시 하느님이 현존하는 곳이었습니다. 카르낙 신전이 보여주듯이 신전을 크고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은 까닭은 거기 현존하는 신이 크고 장엄하고 거룩한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한 까닭은 당신은 이집트의 신들과 다른 방식으로 현존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현존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려 했다는 겁니다. 신전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동성’ 여부였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고정된 장소에 붙박이로 있으면서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그리로 오라고 하는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백성들과, 유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 현존하신다는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야훼 하느님은 정해진 장소에 고정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고정된 질서에 붙박여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이 아니는 겁니다. 야훼는 당신 백성들과 함께 자유롭게 옮겨 다니고 유랑하는 하느님, 낡은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 나가시는 하느님임을 보여주신 겁니다.

백성들과 함께 떠돌아다니는 하느님

히브리인의 하느님과 이집트인의 신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신전의 크기나 화려함에 있지 않고 하느님이 어떤 방식으로 현존하느냐에 있습니다. 히브리 하느님은 옮겨 다니는 신, 유랑하는 신, 기존 질서에서 탈주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신이었고 이집트의 신은 고정된 신전에 붙박이로 현존하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신이었던 겁니다. 신이 현존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삶의 모든 면에서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나중에 결국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다윗이 하려다 못했던 성전 건축을 아들 솔로몬이 했습니다. 사무엘서를 잘 읽어보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던 시기에 그걸 두고 팽팽한 신학논쟁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붙박이 성전은 안 된다, 유랑하는 하느님이라는 신학적, 정치적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와 다른 종족처럼 성전을 짓고 거기에 하느님의 현존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 파가 대립했던 겁니다. 고대세계에서 신전을 건축한 왕은 큰 명예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성전을 지음으로써 성전 건축자라는 명예와 거기서 비롯되는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이유는 양측의 세력이 팽팽해서 그가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명예는 아들 솔로몬이 차지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을 짓자는 측이 권력을 잡았고 솔로몬도 그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이는 히브리인의 전통적인 이집트 탈출의 신학적 관점으로 보면 엄연히 신학적으로 후퇴한 것입니다. 백성들과 함께 자유롭게 유랑하는 하느님,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하느님을 버리고 한 장소와 질서에 매인 하느님으로 되돌아간 것이니 말입니다. 이후에 등장한 많은 예언자들이 성전과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어떤 예언자는 성전에서 바쳐지는 짐승의 살과 기름이 타는 냄새를 하느님이 역겨워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언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의 하느님 현존이라는 신학은 이스라엘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되지 않고 바빌론이라는 타자의 힘에 의해 성전이 파괴됨으로 일단은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훗날 제2성전이란 이름으로 부활했지만 과거와 같은 특권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영’으로 현존하는 하느님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의 종교사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하느님의 현존을 ‘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영’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예언자 요엘에게서 봅니다. 요엘은 ‘그 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그 날이 오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도 했습니다(요엘 2:28-29).

이 말씀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안에 담겨 있는 뜻이 간과되는데 사실은 굉장한 내용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영’은 곧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데 하느님의 현존을 물질이 아닌 ‘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이 신전으로 상징되는 신에 대한 붙박이식의 현존방식을 거부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었듯이 하느님의 현존을 ‘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동안의 퇴보를 불식하고 다시 새로운 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성막이라는 과거의 방식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으면서 그 핵심적인 전통을 되살리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전에 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그러니까 성전이든 성막이든 물질적 건물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현존한다고 이해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런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존재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린 ‘존재감이 있다’거나 ‘존재감이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존재감이 크다고도 하고 작다고도 말하고요. 무엇인가가 존재감이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로든 그것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존재감이 없다는 말은 그것이 있든 없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존재의 의미’라는 말은 그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가리킵니다. 존재감이 크다거나 작다는 말은 그것의 존재로 인해 달라지는 세상의 ‘범위’가 크거나 작을 때 쓰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존재는 존재감이 있기를 바라고 또 기왕이면 그게 크기를 바랍니다. 고대 권력자들이 거대한 건축물을 세운 것은 그것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존재감이 크게 보이고 싶었고 자기가 존재함으로써 세상이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신전 역시 그 신전에 모신 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건축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영’이란 방식으로 현존한다고 믿게 됨으로써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욱이 그 영이 신전이 됐든 성막이 됐든 특정한 건축물 안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현존한다고 믿게 되면서 야훼 신앙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요엘 예언자는 그 날이 오면 하느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부어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고 꿈을 꾸게 하며 환상을 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언, 꿈, 환상, 이런 것들이 상징하는 바가 뭡니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가 아닙니까! 세상에는 하느님의 영이 있음으로 해서 달라질 겁니다. 그 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언을 하게하고 꿈을 꾸게 하며 환상을 보게 한다는 겁니다. 더욱이 현대인들의 눈에는 잘 띠지 않지만 예언자는 하느님의 영이 종들에게도 부어진다고 예언합니다. 요즘이야 종 또는 노예라는 신분이 없지만 과거에는 하느님의 영이 제사장고 아닌, 예언자고 아닌, 왕도 아닌, 보통 사람도 아닌 종들에게 부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그 날이 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대들이 영의 담지자요 성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엘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갔습니다. 요일 이후에 한 동안 그의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의 무용성을, 아니 그걸 넘어서서 성전의 해악을 예리하게 지적하셨고 영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영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예수님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무시오.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46년이나 걸려 세운 성전을 무슨 수로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냐고 조롱했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그 말씀이 예수님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복음서 기자의 이 해석은 요엘 예언자의 예언의 뒤를 잇는,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성령강림 사건을 예고한 기막힌 해석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강림한 사건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붙박이 신전에서의 신의 현존을 믿었던 이집트 종교를 거부하고 백성들과 함께 광야를 유랑하는 이동성 성막에서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조차 뛰어넘어 남녀노소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성령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예언한 요엘의 예언, 그리고 마땅히 무너져야 할 성전 대신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이 모든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역사적 배경인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을 만나러 성전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태껏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믿고 거액의 돈을 들여 교회당을 건축하고 그걸 ‘자랑스럽게’ 하느님에게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이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심스럽습니다. 아니, 저는 이들을 기독교인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똑같이 말씀했지요. 예언자 요엘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부어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오순절에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성취됐습니다. 이제 여러분 모두는 하느님의 영의 담지자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품은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영 또한 여러분 모두를 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의 존재감은 어디서 드러납니까? 하느님의 영의 존재감은 여러분 자신의 존재감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어떤 의미로든 세상이 변한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영의 존재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존재하는데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만의 존재감 상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의 존재감 상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범위라 할지라도 세상이 바뀐다면 여러분의 존재 의미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기총의 정신 나간 전 아무개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서 교인들에게 믿으면 큰 소리로 아멘 하고 응답하라고 강요하더군요. 그걸 보니 제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믿으면 ‘아멘!’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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