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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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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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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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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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일 / 부활절 후 여섯째 주일

그것마저 따먹으면 안 돼!? 2

창세기 3:1-7, 22-24

곽건용 목사

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4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22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23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24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기 3:1-7, 22-24).

영원히 살면 뭐 하나?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것마저 따 먹으면 안 돼!?’라는 제목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될까봐 이들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는 얘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얘기는 영원히 사는 것, 곧 ‘영생’은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걸 갈망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이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까지 먹을 수 있다고 추측하시고는 그걸 먹게 내버려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셔서 선악과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신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맡겨뒀던 하느님이 생명과에 접근해서 그걸 먹는 것만은 자유의지에 맡겨두시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요즘 금요독서모임에서 읽고 있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과거에는 생명과 죽음이란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했고 그래서 종교가 붙들고 씨름하는 주제였지만 지금은 과학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생명과 죽음이 완전히 설명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굉장한 진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의 과학이 생명을 창조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 신비를 푸는 데는 큰 성과가 이루어졌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더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말 그대로 사람이 죽지 않게 될 것이란 얘기입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살해당해서 죽을 수는 있지만 자연사 또는 노환이나 병에 의한 죽음은 겪지 않게 될 것이랍니다. 인간의 세포는 노화해서 죽게 되어 있으므로 인공적으로 끝없이 재생시켜서 영원히 살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주 낙관적인 학자들은 2050년경에는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고 합니다. 불과 30여 년 후의 일입니다.

‘영원히 살면 뭐 하나? 때가 되면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늙고 기력도 없고 병원신세를 진다면 그렇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 나이 들어도 사람 노릇 제대로 하고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다면 영원히 사는 걸 마다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에 유혹을 느꼈을까요? 생명과에는 따먹지 말란 명령이 없었고 선악과에만 금지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걸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형선고까지 붙어있기도 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안전한 생명과가 아니라 위험한 선악과에 유혹을 느꼈습니다. 이 얘기에서 뱀이 사탄이네 뭐네 하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 얘기에 뱀이 등장하는 까닭은 하느님이 만드신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의 내면에 하느님의 명령을 어길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에 만들어진, 그러니까 인간의 내적 욕망을 바깥으로 끌어내서 외재화한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가능성은 본래부터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유혹은 ‘밖에서’ 온 게 아니라 ‘안에서’ 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영화와 연결해서 나중에 좀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왜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에 유혹 당했을까?

그런데 이들이 선택한 것은 생명과가 아닌 선악과였습니다. 성서와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졌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성서 텍스트가 이에 대해 침묵하니까요. 분명한 사실은 하느님은 본래 그것을 허락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이 그것을 못 먹게 한 때는 선악과를 먹은 이후였습니다. 그러니 선악과만 안 먹었다면 생명과를 먹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도 아담과 하와는 생명과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같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자기들이 죽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생명과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에게는 중요한 것이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나 봅니다.

영화에서 네 명의 복제인간이 창조자가 부여한 자리를 이탈해서 지구로 돌아온 것은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주어진 4년만 살고 죽기가 싫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 있었다면 그들은 선악과가 아닌 생명과를 따먹었을 거라고 상상해봤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욕망은 본래부터 있었거나 이식된 것이 아니라 복제인간 내부에서 생겨난 것이란 사실입니다. 영화는 ‘감정’도 그랬다고 말합니다. 타이렐 회사가 복제인간을 만들었을 때는 그들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과 감정을 주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기억’을 이식함으로써 자기들이 복제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기억은 경험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식된 기억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들 복제인간들 중 일부에게 창조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는데 그들 중 일부가 인간처럼 감정을 갖게 됐고 주어진 시간보다 더 살겠다는 욕망을 갖게 된 것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돌연변이 현상이 생겼는데 이는 창조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성서와 영화는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 또는 복제인간은 창조된 그대로, 변하지 않고 창조자의 생각과 의도대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성서와 영화는 공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인간이든 복제인간이든 모두 창조자의 의도와는 다른 존재가 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제인간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반역한 복제인간을 잡아 퇴거시키는 블레이드 러너가 왜 필요했겠습니까. 블레이드 러너는 만들어진 목적을 거슬러 인간에게 반역하는 복제인간을 퇴거시킬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들 아닙니까. 복제인간이 반역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들이 필요할 까닭이 없습니다. 따라서 복제인간은 창조자의 의도와 다른 존재가 된 겁니다.

성서의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창조 목적 그대로 존재한다면 왜 ‘계명’이란 게 존재하겠습니까. 왜 신상필벌이니 사필귀정이니 천당과 지옥이니 하는 게 필요하겠냐 말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누구 하나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그 어떤 예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백성들을 말할 것도 없고요.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했는지를 전하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성서와 영화가 공히 보여주는 진실은, 사람은 창조됐을 때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달라져도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이제 하느님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옥에서 예리하게 인식하고 ‘성인이 된 세계’에서 사람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 분이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였습니다. 세상은 달라졌는데, 세상은 진화했는데, 이미 커서 어른이 됐는데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을 바르게 읽는 눈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어른이 됐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를 비롯한 경전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사실 인간은 이미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런 줄 모를 뿐입니다.

창조자의 의도와는 다른 존재가 됐다!

요즘 종교를 버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무신론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숫자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는 섭섭한 일일지 몰라도 하느님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흐름을 가속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입니다. 세상은 어른이 됐는데 종교는 여전히 그런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엄마 품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과거의 낡은 세계관의 기반 위에서 쓰인 경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대로 행할 수 없음을 알고 또 그대로 행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과거에는 종교가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가 세상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고 여겼습니다. 종교가 부과하는 세계관을 세상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타이렐이 로이에게 “네 생명은 만들 때 정해진 것이고 변경할 수 없어. 그러니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라고 말하면 로이가 그대로 할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로이는 과거의 로이가 아닙니다. 타이렐 회사가 만들었을 때 로이가 아닙니다. 그는 더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가 됐습니다. 창조자의 의도와는 다른 존재가 된 겁니다. 이렇듯 사람과 세상은 모두 달라졌습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저는 그걸 인간의 원초적 타락이라고도 믿지 않고 원죄가 거기서 비롯됐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 행위는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 둘 다 초래했습니다. 어느 편이 더 중한지는 따져봐야 하고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겠지만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선악과를 먹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겁니다. 복제인간이 감정과 더 살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 후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복제인간을 만든 타이렐 회사의 표어가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more human than human)입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게 뭘까요?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다운’ 것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것이 뭔지 알 수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영화에는 인간과 복제인간, 그리고 둘 중 어느 편인지 모를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가 등장합니다. 데커드가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를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리들리 스캇 감독은 그가 복제인간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데커드 역을 연기한 해리슨 포드는 감독의 생각과는 달리 데커드가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감독과 배우가 주인공의 정체성을 달리 이해했다는 얘기입니다. 인간과 복제인간의 차이가 중요한 주제인 영화인데 감독과 배우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정이 이랬는데 어떻게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았을 수 있었겠다 싶기도 합니다.

처음엔 데커드는 자기가 인간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복제인간을 죽이는 데 있어서 추호의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습니다. 복제인간 조라를 죽일 때는 거리낌 없이 뒤에서 총을 쏘기도 합니다. 영화는 그녀가 데커드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줌으로써 그의 잔인함을 극대화해서 보여줍니다. 그런 그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합니다. 그가 로이와 벌인 격투신은 인간과 복제인간에 기대하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제인간이고 또 스스로 복제인간임을 아는 로이는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을 드러내지만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데커드는 정반대입니다. 데커드는 프리스를 잔인하게 죽입니다. 로이는 그런 데커드에게 “무기도 없는 상대방을 죽여? 아주 잔인하군. 여자만 죽이나?”라고 조롱하듯이 말합니다. 또 로이는 데커드와 싸우다가 “도망갈 여유를 주겠어.”라고 봐주기도 하고 데커드가 자기를 때리고 도망치자 “때리고는 도망가? 비겁한 꼴에 비참하기까지 한 꼴이군.”이라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데커드가 지붕에 매달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로이는 그를 구해주고 자신은 죽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우리에게 과연 인간다움이란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묻게 만듭니다.

인간이 복제인간을 만든 이유는 오염된 지구를 버리고 옮겨가서 살 행성을 개척하는 힘들고 위험한 일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티브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가져왔다고 보입니다. 그 신화에서는 낮은 신들이 높은 신들의 명령을 받아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다가 합니다. 그러다가 낮은 신들이 일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높은 신들에게 아우성하고 불평을 늘어놓아 높은 신들이 밤잠을 설치자 하위 신들 대신 힘들고 위험한 일을 시키려고 만든 존재가 사람입니다. 영화에서 복제인간이 만들어진 이유와 똑같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복제인간을 가장 인간처럼, 또는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만들었을까요? 꼭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일만 잘 하는 로봇을 만들면 될 것을 굳이 가장 인간처럼, 또는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만들어서 이런 문제를 만들었을까요? 그것도 인간처럼 기억을 이식해가면서까지 말입니다. 이 질문은 왜 하느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었을까 하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그 동안 신학은 하느님의 형상이 뭔지를 두고 논쟁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의지라고도 하고 인권이라고도 하며 소통 능력이나 상호주관적 관계 형성 능력 등으로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사람이 복제인간을 가장 인간적으로 만든 이유는 창조자의 오만이라고 저는 봤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오만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영화를 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럼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하느님도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을까요? 불경하다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하느님은 괘념치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을 제한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로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게 됐습니다. 이른바 인간 중심주의가 그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사물을 자기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게 하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관점과 가치관을 다른 존재들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그걸 강요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을 영화를 보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영화에서는 인간이 창조자, 곧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복제인간이 인간의 위치에 놓여 있지요.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이 복제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마치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는 인간이 부여한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도 그들만의 독자적인 존재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는데 인간을 그것조차 모두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조절하려 한다는 겁니다. 인간중심주의는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인간중심주의는 일종의 폭력입니다.

혹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지난 주일에 농담반 진담반처럼 던졌던 질문, 왜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두말 하지 않고 받아먹었을까 라는 물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정작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명령을 받은 당사자는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었습니다. 그때 하와는 창조되기 전이었습니다. 물론 하와도 그 금령을 알았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고 그걸 남편에게도 줬다고 해서 오랫동안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해봤습니다. 이 얘기는 남성우월주의 신화를 뒷받침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담이 하와가 주는 선악과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먹은 것이 왜 ‘남성열등주의’를 만들어내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선악과를 절대 먹지 말라는 금지명령을 직접 들었으면서도,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일종의 ‘사형선고’ 또한 들었으면서도 왜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는 덥석 먹었는가 말입니다. 저는 영화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봤습니다.

영화에서 왜 복제인간이 4년이란 제한을 뛰어넘어 더 살고 싶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던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반역을 저질렀다가는 창조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제인간들이 더 살겠다고 해서 지구로 돌아와 창조자를 찾아갔던 것은 그들 간에 ‘사랑’이 싹텄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복제인간들에게는 본래 창조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더 살고 싶다는 욕구와 감정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보여주는 진실은, 복제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 겁니다. 데커드에 의해 죽임을 당한 프리스와 로이는 확실히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사랑’은 ‘감정’과는 다릅니다. 감정과 별개는 아닐지라도 감정만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들이 더 살고 싶었던 것은 ‘서로 사랑하면서’ 더 살고 싶었던 겁니다. 저는 그래서 이들이 더 일찍 죽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자를 찾아가서 더 살게 해달라고 했다고 봅니다.

왜 아담은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덥석 받아먹었을까요? 물론 그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덥석 받아먹었는지, 아니면 ‘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느냐?’고 야단을 쳤는지,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을 한 판 벌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초래될 결과를 잘 알고 그랬다는 겁니다. 혹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둘이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본 순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탄성을 올렸지요. 그 후 둘은 에덴에서 함께 지내면서 그것 이상의, 그러니까 육체적인 사랑 이상의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 사랑이 아담으로 하여금 결과를 알면서도 이미 아내가 먹은 선악과를 먹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물론 제 이런 얘기는 텍스트 상의 근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먹은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설명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입니다. 로이가 죽고 데커드가 자기 집에 돌아와 보니 레이첼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데커드는 그녀가 거기 있는 것을 보고 안도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또 자기를 믿느냐고도 묻습니다. 이에 레이첼은 그를 사랑하고 믿는다고 대답하지요. 그리고 이들을 탈주를 감행합니다. 두 사람을 그 상황에서 탈주하게 만든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봤습니다.

이것으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갖고 하는 설교를 마칩니다.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므로 그에 관해 얘기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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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4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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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7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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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3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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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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