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8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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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9-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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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8일 / 성령강림절 열아홉 번째 주일

야훼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이사야 58:7-10

곽건용 목사

'봉헌‘의 일부인 ’헌금‘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헌금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 세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요약하면, 헌금은 제물이 아니고 십일조는 본래 헌금이 아니었으며 예수께서 전 재산을 헌금한 과부를 칭찬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헌금은 하느님의 호의를 사서 더 많은 복을 받고 재앙은 피하려고 하는 제물이 아닙니다. 또한 헌금은 하느님이 쌓아둘 곳이 없이 복을 퍼부어주나 시험하기 위해서 돈을 바치는 행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 한 번 말씀했는데 그게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악착같이 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이 계명의 더 중요한 덕목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일조뿐 아니라 헌금제도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과부가 전 재산인 동전 두 닢을 헌금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가 누구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말씀하면서 그 까닭은 그녀가 전 재산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과부로 하여금 그녀의 전 재산을 털어 넣게 만드는 잘못된 헌금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사실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율법학자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신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전 재산인 동전 두 닢까지 털어가는 불의한 헌금제도를 비판하셨던 겁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하는 헌금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가면 맨날 돈 얘기만 한다고 불평합니다. 헌금의 종류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니던 교회를 떠난 사람도 많고 아예 교회가 싫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럼 헌금이 이렇게 문제가 많으니 헌금제도 자체를 없애버려야 할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내버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헌금이 잘못 드려지고 있다고 해서,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걸 없애자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제도를 고쳐서 바르게 시행하면 됩니다.

헌금은 ‘봉헌’(奉獻)의 일부입니다. ‘봉헌’은 ‘받들 봉(奉)’ 자에 ‘드릴 헌(獻)’ 자를 씁니다. 말 그대로 ‘받들어 바치는 행위’가 봉헌입니다. 공동의 선, 공동의 정의, 공동의 평화, 공동의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드리는 행위가 ‘봉헌’입니다. 남을 위해서 나의 일부든 전부든 바칠 추호도 생각이 없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에게는 ‘봉헌’이든 ‘헌금’이든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이 헌금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더 큰 행복을 위해서, 자기가 더 많은 복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니 그것은 헌금도 아니고 봉헌도 아닙니다. 헌금이란 말에는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공동선을 위해서, 공동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헌금은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인데 그걸 왜 공동선이니 공동의 행복을 위해 바치는 것과 동일시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공동선이니 공동의 행복이니 하는 것은 다 좋지만 그게 하느님의 일은 아니므로 그걸 위해 돈을 바치는 걸 ‘헌금’이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미가서 6장 6절에서 8절의 말씀을 들려주겠습니다.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숫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헌금은 ‘누구에게’ 하는지 보다 ‘무엇을 위해서’ 하는지가 중요

헌금을 ‘누구에게’ 하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하느님에게’ 한다고 대답할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러면 ‘하느님에게’ 왜 돈을 드려야 하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합니다. 왜 하느님에게 돈을 바칩니까? 하느님이 돈이 궁해서일까요? 하느님이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까 헌금하나요? 아니면 돈으로 내 믿음을 증명하려고 헌금합니까? 돈의 액수와 믿음의 크기는 비례하니까 말입니다. 모두 틀렸습니다. 헌금은 하느님이 돈이 부족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헌금하는 사람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왜 헌금을 하는 걸까요? 헌금하는 이유와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헌금을 ‘누구에게’ 하느냐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헌금은 ‘누구에게’ 하느냐고 묻지 말고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고 물어야 맞습니다. 이것이 헌금에 대한 올바른 질문입니다. 하느님은 돈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헌금을 하느님에게 한다는 대답은 옳지 않습니다. 헌금을 하면 하늘나라에 은행이 있어서 거기에 예금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 복리로 이자가 붙은 내 돈을 찾아서 쓰려고 예금하는 돈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헌금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바치는 돈입니다.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계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돈이 헌금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위한 봉헌의 일부인 셈입니다. 헌금은 하늘이든 땅이든 어딘가에 예금해서 축적하는 돈이 아니라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와 해방과 평화와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기 위해 소비하는 돈입니다. 따라서 헌금하는 사람은 그 돈을 어떤 식으로든 돌려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형태의 대가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헌금에 대가가 있다면 그것은 공공의 정의와 평화가 증진되고 공공의 행복이 확산되어 다 같이 행복을 누리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바쳤으니 안 바친 사람에 비해서 더 많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헌금도 아니고 봉헌도 아닙니다. 헌금은 ‘거래’가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것이 ‘금식’

‘금식’(fasting)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에게 바치는 최고로 경건한 의식(ritual)입니다. 성서를 보면 하느님이 들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나 참회할 일이 있을 때 금식이라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기가 죽을 지경이 되자 아기를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또한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들이 회개하라는 요나의 선포를 듣고 사람들은 물론이고 짐승까지도 모두 금식하며 참회했습니다. 이렇듯 금식은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려야 하는 일이 있을 때 행했던 종교의식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금부터 2,500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를 통해서 금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느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눠주고 나그네를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이랍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생각해온 금식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금식은 이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금식은 밥 안 먹고 굶어가면서 하느님이 들어주시기 바라는 간절한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닙니까. 곡기를 끊고 나를 가장 나약한 상태로 몰아넣어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느님은 당신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그런 게 아니라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주며 굶주린 사람은 먹이고 헐벗은 사람은 입히는 것이는 겁니다. 이런 행위가 어떻게 금식이 됩니까? 스스로 굶는 게 아니라 굶은 사람을 먹이는 게 금식이랍니다! 이런 역설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나라 운동을 시작하시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은 후에 예수님은 “이 성경말씀이 그대들이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의 금식에 관한 말씀과 비슷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제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려는 하느님나라 운동은 야훼께서 기뻐하는 금식과 궁극적으로는 같은 일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금식’은 하느님을 향해서 행하는 종교의식과 행위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하느님을 향해서 하는 모든 종교행위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곧 이 땅에 정의와 자비와 신의가 바탕이 되는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행위가 맞닿아 있습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봉헌하는 게 적당

다시 말하는데 헌금은 하느님의 호의를 얻어서 더 많은 복을 받고 화를 피하려고 드리는 돈이 아닙니다. 헌금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르려는 예수의 제자들이 지금 여기서 하느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드리는 돈이고 시간이며 땀이고 눈물입니다. 헌금은 드리고 나면 기억에서 지워야 하는 돈입니다. 그것은 공공의 선을 위해, 공공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소비되어 어디선가 나도 모르는 곳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헌금은, 더 넓게 보면 봉헌하는 삶은 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겁니다. 그저 자기 하나 잘 되자고, 남보다 더 잘 살고 성공하고 출세하는데 전심전력하는 세태를 역행해서 공공의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를 헌금하는 게 적절한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각자의 수입에서 어느 정도를 봉헌하는 것이 좋을까요? 물론 이 문제는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제가 이제부터 말하는 내용은 그저 가이드라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수입의 십분의 일 정도를 봉헌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다양한 형태의 봉헌에 사용하자는 겁니다. 사실 십일조는 구약성서의 제도이지만 우리 인간이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일정부분을 공공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진리입니다. 그 정도의 비율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겁니다. 단, 우리가 봉헌하는 제도나 기관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고 애쓰는 제도나 기관인가 하는 점은 늘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소비하는 돈으로서 굳이 대가가 있다면 공공의 행복이 증진되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하느님나라에 가까워지는 것이 유일한 대가가 될 겁니다.

우리는 지금 향린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향린교회가 하느님나라 건설에는 아무 뜻도 없고, 이를 위해 헌신하지도 않고, 공공의 정의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고 향린교회에 봉헌할 까닭도 없을 겁니다. 향린교회를 통해서 뭔가를 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정성을 다해서 봉헌하는 것뿐 아니라 향린교회가 제대로 예수의 교회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이것으로 ‘헌금’과 ‘봉헌’에 대한 얘기는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기도’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