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9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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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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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9일 / 성령강림절 스물두 번째 주일
춤추는 하느님과 함께 찬양!
시편 149:1-9
곽건용 목사
서양음악은 곧 하느님 찬양
오늘은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하는가?”라는 주제로 하고 있는 시리즈 설교 중 세 번째 주제인 ‘찬양’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봉헌’과 ‘기도’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고 오늘 ‘찬양’에 대해 얘기하면 앞으로 ‘말씀’이라는 주제 하나만 남습니다.
여러분은 ‘찬양’ 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릅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상이 어떤 겁니까? 아마 이런 것일 겁니다. 흰옷을 정결하게 입은 빈 소년합창단 같은 찬양대가 완벽한 화음을 이루는 아름다운 노래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음미하며 감상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찬양한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그림은 대체로 이런 걸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서양음악의 역사는 곧 하느님을 찬양할 목적으로 창작된 교회음악의 역사라고 불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찬양’은 서양음악 창작의 중요한 동기요 목적이었습니다. 작곡가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탤런트를 발휘해서 음악을 만들었고 연주자들 역시 자기들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최고의 탤런트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이렇듯 오랫동안 교회의 영향권 안에 있던 서양음악이 그 영향권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괴히 오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양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음악은 세속화된 현대사회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의 역사는 고전음악 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됐습니다. 찬양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신약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공히 예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구약성서가 전하는 150편의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 때 불렀던 찬양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구약성서 시대에는 예배에서 당연히 이들 시편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산문처럼 평이하게 읽지만 사실 시편은 리듬과 멜로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서를 보면 시편은 다른 악센트를 사용함으로써 산문과 구별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은 악센트를 보면 운문인지 산문일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시편은 노래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신약성서만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예배했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남겨놓은 많은 문서들을 보면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찬양이 그때도 예배의 중요한 요소였고 시편이 거기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때도 시편은 운율과 리듬을 살려서 노래했을 겁니다. 이는 오늘 읽을 시편 149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 앞에서 찬양하여라.
이스라엘아, 창조주를 모시고 기뻐하여라.
시온의 주민아, 너희의 임금님을 모시고 큰소리로 즐거워하여라.
춤을 추면서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소구 치고 수금을 타면서 노래하여라.
이 시편의 분위기가 어떤가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상상되나요? 어떤 모습으로 이 노래를 불렀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적어도 빈 소년합창단이 성가를 부르고 관객들이 조용히 앉아서 아름다운 천상의 하모니를 듣는 모습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기뻐하며 큰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이, 춤을 추며 소구 치고 수금 타며 노래하는 모습이 빈 합창단보다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고유의 가락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찬양하는 것에 더 가깝지 않겠습니까.
찬양은 노래와 춤
‘찬양’은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찬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노래지만 방금 읽은 시편이 말하듯이 찬양은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며 춤을 추면서 그 이름을 찬양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시편을 읽으면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먼 옛날부터 노래하고 춤을 췄는데, 벌거벗고 돌도끼 들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사냥하던 원시인들도 노래를 불렀고 춤을 췄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요? 왜 사람은 노래를 불렀고 춤을 췄을까요?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게 했는가 말입니다. 왜 사람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면서부터 노래불렀고 춤췄는가 말입니다. 본능이었을까요? 노래하고 춤추는 유전자가 사람에게 있는 걸까요? 제가 그 방면에 아는 게 없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갖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노래와 춤은 신과 소통하는 통로였다는 사실입니다. 곧 매우 오래 전부터 사람은 노래와 춤으로 신과 소통했습니다. 인류가 체계를 갖춘 종교를 갖기 훨씬 전부터 말입니다.
인류가 신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름을 뭐라고 부르든 신을 믿는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신과 교류하는 것이지요.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정신적, 지적, 정서적, 영적인 능력으로 갖고 신을 탐구하는 겁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이 누구이지를 탐구하는 학문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신학(神學) 곧 ‘테오로기아’가 있는 겁니다. 테오로기아는 신을 가리키는 말인 ‘테오스’와 이야기를 지칭하는 말인 ‘로기아’의 합성어입니다. 신학은 그러니까 신에 관한 이야기,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정신적, 영적 능력을 동원해서 하느님에 대한 얘기를 펼쳐놓은 것입니다.
신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두 번째 방법은 신이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를 포착하는 겁니다. 이것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계시’(revelation)라고 부르지만 저는 ‘계시’라는 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말이 매우 불만스러워서 쓰고 싶지 않은데 까닭은 기독교에서 이 계시라는 말이 ‘언어를 통한 신과 사람 사이의 소통’으로 국한되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람과 소통하는 수단은 언어 외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제가 좋아해서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첫 장면은 이렇습니다. 주인공 형제의 아버지인 장로교 목사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늘 낚시를 하는 강가로 가곤 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는 강가의 돌을 하나 들고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5억 년 전에 진흙에 비가 내려서 이 돌이 됐는데 주님의 말씀은 그 이전부터 있었단다. 그러니 너희들도 들어 보거라.” 그리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흐르는 강물과 바위를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어린 아들들도 무릎을 꿇고 강물이 바위를 스쳐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바위 밑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나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5억 년 전에 만들어진 돌멩이 아래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 강물이 흐르면서 바위를 스쳐지나갈 때 들리는 하느님의 음성, 이 장면이 제게는 무척 인상적입니다.
찬양은 하느님이 보내는 신호에 대한 응답
어딘가에도 썼지만 제가 구약을 공부하고 예언서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구약을 보면 하느님이 예언자들에게 직접 말씀했다고 하는데, 또 지금도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왜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그게 의문이고 불만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제 잠정적인 결론은 하느님이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할 때 구체적인 언어를 통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신호나 파동 같은 것을 보내신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다 얘기할 수는 없는데 한 가지만 얘기해보겠습니다.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라고 기록해서 전하고 있는 말씀, 곧 신탁(oracle)은 하느님이 보낸 파동과 같은 신호를 사람이 각자의 안테나로 받아서 그걸 사람끼리 통하는 언어로 번역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엄청난 얘기죠? 아직까지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근거 없이 제가 이런 엄청난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서, 특히 예언서를 잘 읽어보면 동일한 시기와 동일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갑이라는 예언자와 을이라는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하느님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쟁이라서가 아닙니다. 물론 둘 중 하나가 자기 얘기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경우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갑과 을은 하느님이 보낸 신호를 서로 달리 해석했던 겁니다. 따라서 두 예언자가 전한 메시지가 서로 다르더라도 둘 중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지만, 저는 대개의 경우는 전자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들이 하느님의 의사를 진실하게 전하려 했다면 말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불현듯 영화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맨몸으로 블랙홀을 통과한 주인공은 5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시간도 하나의 축으로 작용하는 거기서 그는 자기 딸을 보고 그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딸이 자기 방에 유령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는데 바로 그게 5차원 세계에서 딸에게 신호를 보낸 아버지였던 겁니다. 저는 하느님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소통에 대해서 더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이 얘기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앞에서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얘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파올로 코엘료의 책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한 선교사가 자기가 거주하는 시 외곽의 사막으로 매일 산책을 갔는데 거기서 한 사내가 사막에 누워서 귀를 바닥에 대고 모래를 쓰다듬고 있더랍니다. 첫날에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가 매일 똑같이 누워있으니까 선교사가 그에게 뭐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사막과 벗하며 그의 외로움과 눈물을 닦아주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선교사가 사막도 우는 줄 몰랐다고 말하자 그는 사막은 매일 운다고, 사막의 꿈은 곡식도 꽃도 심을 수 있고 양도 먹일 수 있는 너른 들판이 되어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운다고 대답했습니다.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사막에게 말해주세요. 사막은 사막대로 쓸모가 있다고 말입니다. 사막을 걸을 때 사람은 신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다고, 사막의 모래를 바라보며 각자는 운명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동등한 사람으로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고, 사막의 지평선에 해 뜨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 가득 차오르고 창조주께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다음날에도 선교사는 사내가 여전히 사막에 누워있는 걸 보고 “어제 제가 한 얘기를 사막에게 다 해줬나요? 그래도 아직 울고 있나요?”라고 물으니 사내는 그렇다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사막이 훌쩍이기만 해도 다 들을 수 있어요. 이제 사막은 수천 년 동안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인 줄만 알고 신을 원망하고 제 운명을 비관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걸 뉘우치며 울고 있어요.” 그러자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막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인간들도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신에게 불평하며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고 말해주세요. 어렵게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발견해도 어차피 늦었다며 삶을 바꾸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고요.” 하지만 사내는 사막이 워낙 고통에 익숙해 있어서 그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고 자신 없어 하자 선교사는 “그럼 제가 희망을 잃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라고 말한 다음에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각자의 종교가 가르치는 방식대로 말입니다.
다음 날 가보니 사내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늘 쓰다듬던 자리에서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몇 달 후에 그 샘은 더 커져서 마을 사람들이 둘레에 돌을 쌓아 우물을 만들었습니다. 베두인 사람들은 그 곳을 ‘사막의 눈물이 고인 우물’이라고 부르는데 그 물을 마시면 가슴 속의 고통의 샘이 기쁨의 샘으로 바뀌기 때문이랍니다.
춤추는 신에게!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선언한 철학자 니체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만일 내가 신을 믿는다면 나는 춤추는 신만을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짐작되는 미국의 괴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샘 키인(Sam Keen)은 <춤추는 신에게>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 이 책의 제목에 언급된 춤추는 신은 아폴로도 디오니소스도 아니다. 그는 실로 이름이 없다. 아마 그는 계속해서 이름이 없을 것이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유일한 것은 그가 나로 하여금 우발적인 삶과 계산된 삶을 동시에 살게 하고 황홀경과 결단의 순간을 같은 정도로 체험하게 하며 즉흥성과 약속 속에서 항상 머물게 하리라는 것뿐이다. 항상 그랬듯이 거룩한 것은 그 거룩한 것을 이해하느라고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개념과 범주들을 산산이 부숴버린다. 그리하여 춤은 계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다. 그것을 위하여 나는 이 술을 바치려는 것이다.
‘찬양’이 무엇일까요? 왜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까? 찬양, 곧 노래와 춤은 하느님이 보내는 신호에 사람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노래는 하느님이 보내는 가락에 내 음성을 얹는 것이고 춤은 하느님이 보내는 파동에 내 몸을 맡기는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의 노래와 춤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느님과 사람이 부르는 노래와 추는 춤으로 충만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찬양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인 한 분이 제게 예배시간에 찬송가나 복음성가 아닌 일반 세속적인 노래를 불러도 괜찮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대답을 반복합니다. 찬양이 하느님이 보내시는 신호 또는 파동에 반응하는 것인데 누가 그 흐름을 막거나 그 흐름의 통로를 맘대로 정하거나 규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보내시는 신호에 반응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가락이고 리듬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찬양하세요! 예배 중이든 언제든 하느님이 보내시는 신호가 느껴지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반응하는 대로 마음껏 반응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찬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