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3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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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Date
2016-10-2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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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3일 / 성령강림절 스물네 번째 주일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말씀
신명기 11;18 요한복음 1;14 히브리서 4;12
곽건용 목사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없애주십시오”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나는 하느님에게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부족한데 내 안의 하느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니 말입니다. 내 안의 이기심이나 악한 성품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기도에는 두 가지의 깨달음이 들어있습니다. 무한한 하느님은 유한한 내 속에 갇혀 있지 않는 분이라는 깨달음이 그 하나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하느님을 좁은 내 생각과 신앙 속에 가두고 싶은 욕구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신앙인이라면 무한한 하느님을 사람의 좁은 생각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광고를 좀 하자면 이번에 제가 낸 책 제목이 <알 수 없는 분>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하느님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구약성서 시대에는 눈으로 보이는 형상이 우상이었습니다. 위로 하늘에 있거나 아래로 땅에 있거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이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까지 우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됐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내가 온전히 인식하고 이해했다고 믿는 하느님이 바로 우상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면 어느덧 슬며시 빠져나가 손을 펴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종교에서 ‘상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은 합니다. 종교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형상들은 거의 모두가 상징적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릅니까? 어떤 형상이 떠오릅니까? 많은 사람들은 몸집과 키가 크고 흰 수염과 푸른 눈의 백인 할아버지를 떠올릴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정말로 그렇게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작년에 나온 <엑소더스> 영화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감독은 모세가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만난 하느님을 어린아이로 표현했습니다. 모세는 그에게 “당신은 누구요?”(Who are you)라고 물었고 그 아이는 “나다”(I am)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하느님이 정말 어린 아이의 모습을 가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독이 뭔가를 말하려고 사용한 상징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그리는 하느님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상징(symbol)과 사실(fact)은 다릅니다. 종교는 사실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진실(truth)를 추구하는 사람의 정신활동입니다. 상징은 진실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상징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상징은 사실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왕 둘을 혼동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을 사실이나 진실로 혼동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럴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좁은 생각과 제한된 인식 속에 가두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은 우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시(詩)는 어떻게 쓰이는가?
오늘은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하는가?” 시리즈 설교의 마지막 주제인 ‘말씀’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오랜만에 영화 얘기를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제가 얘기할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시>입니다. 이 영화는 강에 투신자살한 소녀의 시체가 강물 위로 떠오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소녀는 주인공 양미자 할머니의 외손자를 포함한 몇 명의 남학생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한 다음에 견디지 못하고 투신한 여학생입니다. 양미자는 이혼한 딸이 맡긴 외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할머니인데 감수성이 풍부하고 시를 좋아하며 소녀풍으로 차리고 다니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중풍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한 노인을 간병하며 겨우 살아갑니다.
양미자는 시를 좋아해서 직접 써보고 싶어서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 창작 강좌를 들으며 시를 배웁니다. 그녀는 시를 쓰고 싶지만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하는데 강사 시인에게 물으니 시상은 절로 오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야 한다는 답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시상을 얻으려고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며 살피고 관찰하지만 쉽게 시상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손자가 친구들과 함께 여학생을 성폭행했고 그 여학생은 투신자살했음을 알게 됩니다. 손자의 보호자인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개입하는데 설상가상으로 뭔가를 자꾸 잊어버리는 증세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습니다.
시간 관계상 영화 줄거리를 다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양미자는 그러는 중에도 시를 써보려고 애를 쓰는데 손자 사건을 겪은 후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전에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서 시상을 얻으려 했는데 그게 달라진 겁니다. 손자 사건 후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여학생의 시신이 발견된 강가에 나가서 시를 쓰려고 수첩을 꺼내드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수첩은 비에 젖어 그녀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감전된 것 같이 말입니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이 장면을 만든 감독의 의도는 시라는 것은 글자로 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쓰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막 시를 쓰려는 순간 소나기가 쏟아져 글로 시를 쓰지 못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양미자는 여학생 성폭행에 가담한 남학생의 부모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할 때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곳으로 숨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현실을 피해서 시 속으로 숨었던 겁니다. 하지만 현실을 영원히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녀는 죽은 여학생의 추모미사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샤워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손자를 붙들고 신음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깨닫지요. 이런 일들과 별개로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 창작 마지막 수업에 그녀는 교실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강사 시인은 그녀가 제출한 시를 모두에게 낭송해 줍니다. 그녀가 쓴 시의 제목은 ‘아네스의 노래’인데 유투브를 찾아보니까 박기영 씨가 부른 노래가 있더군요.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아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게 뭘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걸까요? 저는 과거에는 성서 텍스트를 잘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려면 텍스트가 쓰인 언어도 알아야 하고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도 잘 알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제가 ‘비밀’이란 말을 썼지만 하느님이 심술궂게 사람들에게 뭔가를 감추려 하기 때문에 그 말은 쓴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본래 ‘알 수 없는 분’이기에 사람으로서는 그분을 아는 것은 비밀을 푸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코드로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암호화 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영화 <인터스텔라> 얘기를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일종의 ‘파동’과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이렇게 암호로 전해진 말씀의 암호를 풉니다. 인코딩되어 있는 말씀을 디코딩한다는 얘기입니다. 전체 하느님의 말씀을 1백이라고 가정하면 암호로 전해진 말씀은 33이고 그것을 받아서 암호를 풀어서 전하는 사람의 몫이 33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기의 경험과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담아서 하느님의 암호를 풀어내서 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33은 누구의 몫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렇게 들은 말씀을 여러분은 여러분의 경험과 신앙과 희망, 사랑을 담아서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은 온전히 전해지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귀만 갖고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성가대의 찬양을 듣는 것이 교회에 와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므로 귀만 갖고 오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약간은 자조적(自嘲的)인 얘기죠. 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올 때 귀만 갖고 오지 말고 온 몸을 다 갖고 오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귀로만 듣는 하느님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온 몸으로 느끼고 행하는 하느님입니다. 이것이 성육신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늘의 세 짧은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가 한 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고 또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신명기 11:18).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요한 1:14).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브리서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