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7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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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Date
2016-11-2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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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7일 / 대림절 첫째 주일
교회에서 여성은 누구인가? (1)

세상의 절반을 어찌 이렇게 대하나!
디모데전서 2:9-15

곽건용 목사

‘여성’에 대해 얘기할 때가 됐다

오늘부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오늘부터 12월 18일까지 4주 동안 이어집니다. 대림절의 주인공은 누굴까요? 당연히 아기 예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가 탄생하기 전까지의 기간이고 그 기간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간이므로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누가 주인공일까요? 대림절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의 주변인물들입니다. 그러니까 대림절의 주인공은 마리아와 요셉을 비롯해서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헤롯왕과 동방박사들,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되겠습니다.

지지난 주 토요일에 OC 영화 모임에서 곤혹스러운 영화를 봤습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중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관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고 참석자들 모두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근친상간’을 얘기하는 영화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토론하는 중에 한 참석자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소돔이 하늘에서 떨어진 유황불에 의해 멸망됐을 때 롯은 두 딸을 데리고 소돔을 빠져나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롯의 두 사위는 같이 피하자는 장인의 말을 듣지 않아 불벼락을 맞아 죽었고 롯의 아내는 도망치던 중에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남편의 말을 안 듣고 뒤를 돌아보아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가족 중에 남은 사람은 롯과 두 딸뿐이었는데 이들이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에 아버지와 동침해서 아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참석자는 이 얘기가 창세기 19장에 전해진 대로 벌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만취한 롯에게 두 딸이 주도적으로 동침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두 딸과 강제로 동침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구약성서가 본래 철저하게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 위주로 쓰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책임을 딸들에게 전가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텍스트 상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여러 번 읽었으면서도 아직까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참석자는 제가 생각해보지 않은 생각을 한 겁니다. 저는 얼마든지 가능한 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도주에 만취해서 잠자던 아버지가 딸을 임신하게 했다는 것도 벌어지기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성서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절대로 변경할 수 없고 변경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축자영감설’을 주창자에게는 ‘경을 칠’ 얘기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는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일 후에 저는 우리 교회에서 ‘여성’에 대한 얘기를 할 때가 이제는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서는 세상의 절반은 여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여성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여성은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고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나머지 절반인 남성들은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얘기할 때라고 생각한 겁니다. 게다가 아기 예수 주변 인물들 중에서 단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두드러졌고 그녀가 대림절의 주인공이므로 이 계절에 여성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 잘 어울린다고도 생각합니다.

현재 교회력에 따르면 마리아는 대림절에만, 그것도 오로지 한 번만 얘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2016년 대림절에는 교회가, 특히 가톨릭교회가 중시하는 마리아를 한 개인으로 보지 말고 세상의 절반인 여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고 여성에 대해서 얘기해보려는 겁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누군지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해당됩니다. 여성, 특히 마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다양한 모순을 담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좀 더 범위를 넓혀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은 그들이 갖고 있는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해왔습니다.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해왔다고만 말하면 지나치게 좋게 말한 겁니다. 여성은 부당하게 억압당해왔고 착취당해왔으며 무시당해왔습니다. 왜, 어떻게 이렇게 여성들이 억압과 착취를 당해왔고 무시당해왔는지는 앞으로 차차 얘기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답해야 할 질문은 교회와 기독교신학이 여기서 어떤 역할을 어떻게 얼마만큼 했느냐 하는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서구교회가 홀로 여성 잔혹사의 책임을 져야 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남성인가?

서구교회가 여성 잔혹사에서 해온 일들 중 하나는 하느님을 남성으로 그려왔다는 겁니다. 먼저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에 그린 ‘천지창조’ 중에서 아담의 창조의 부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나이 들고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백인남자로 그려져 있고 아담도 파란 눈의 젊은 백인남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특별한 의도를 갖고 하느님과 아담을 다른 인종(race)이나 다른 성(gender)이 아닌 백인남성으로 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극히 자연스러웠습니다. 하느님과 아담을 다른 인종, 다른 피부색, 다른 성(性)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하느님에게 성(性)의 구별이 있습니까? 하느님은 남성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성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남성이라고 여깁니다. 저는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에서 이 문제를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그림을 그렸던 때가 16세기 초였습니다. 그로부터 5백 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달라졌습니까? 그렇습니다. 달라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의식 깊은 곳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남성으로 생각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두 가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구소련을 개혁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무신론자이지만 그의 아들은 세례를 받았답니다. 아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 미국 기자가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은 하느님을 믿는가?”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는 “I do not believe HIM.”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인 그도 하느님을 남성(HIM)으로 표현한 겁니다. 또한 유명한 여성신학자인 로즈마리 류써(Rosemary Ruether) 교수가 한 학회에서 하느님이 독점적으로 남성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고 발표하니까 한 남성 신학자가 격분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God is not man. HE is spirit!” 하느님은 남자가 아니라고 말해놓고는 바로 ‘그’(HE)는 영이라고 말한 겁니다. 그의 의식세계에서는 하느님이 남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무의식 세계에서는 여전히 하느님은 남자였던 겁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곧 남자’라고 생각하게 되면 남자를 하느님처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포함해서 삶을 지배하는 것도 당연해지는 겁니다. 과거에는 이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남성 중심사회였고 가부장 사회였으니까 말입니다. ‘남성 중심사회’(androcentrism)란 단지 남성이란 이유만으로 남성에게 특권을 주는 사회를 가리키고 ‘가부장사회’는 지배적인 남성이 항상 권력을 잡고 있는 사회구조를 가리킵니다. 과거 서구사회는 남성 중심사회였고 가부장사회였습니다. 작게는 가족에서부터 크게는 나라 전체가 이랬던 겁니다.

여성은 불결하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구약성서에서는 여자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불결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여자가 월경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의학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월경의 기능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단지 그것을 더럽고 불결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 점을 강조한 책이 레위기인데 그 예를 몇 개만 들어보겠습니다.

여자가 몸에서 피를 흘릴 때에 그것이 그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 그 여자는 이레 동안 불결하다. 그 여자에게 닿는 남자는 모두 저녁때까지 부정하다.[레 15:19]

어떤 여자가 자기 몸이 월경 기간이 아닌데도 여러 날 동안 줄곧 피를 흘리거나 월경 기간이 끝났는데도 줄곧 피를 흘리면 피가 흐르는 그 기간 동안 그 여자는 부정하다. 몸이 불결한 때와 같이 이 기간에도 그 여자는 부정하다.[레 15:25]

그 여자가 피를 흘리는 동안 눕는 잠자리는 모두 월경 기간에 눕는 잠자리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그 여자가 앉는 자리도 월경 기간에 앉는 자리가 부정하듯이 모두 부정하다.[레 15:26]

너는, 여자가 월경을 하고 있어서 몸이 불결한 기간에는 여자에게 가까이하여 그 몸을 범하면 안 된다.[레 18:19]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아처럼 구약성서는 여자를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불결하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자를 단지 월경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남자보다 더 불결하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성서가 말하는 것이니까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할까요? 구약성서를 경전이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할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긴 몇 년 전에 한국의 한 정신 나간 목사가 ‘기저귀’ 차는 사람을 강단에 세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동조하거나 그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여자는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신약성서는 좀 나은가요?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에 비해서 좀 낫긴 합니다. 하지만 신약성서에도 오늘 읽은 본문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자들도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몸을 꾸미기 바랍니다. 머리를 어지럽게 꾸미거나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에게 어울리게 착한 행실로 치장하기를 바랍니다.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어느 누가 이 말에 동의하겠습니까. 좀 전에 이 본문을 읽었을 때 여러분 대다수는 웃지 않았습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지요. 이런 얘기가 성서에 나오는지 모른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여자들도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몸을 꾸미랍니다. 머리를 어지럽게 꾸미거나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에게 어울리게 착한 행실로 치장하라고도 했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여러분 대부분이 불합격입니다. 장식물 하나 안 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우라고,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려 하지 말하고 했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의 지배를 받아 마땅한 이유는 아담이 하와보다 먼저 지으심을 받았고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죄에 빠졌기 때문이란 겁니다. 하지만 여자에게도 구원받을 길이 있으니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이랍니다.

기가 막히지 않나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이런 얘기가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는 신경 쓰지 않고 없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한국에 가서 모임에 참석했을 때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 유명한,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이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에 대한 제 얘기를 듣더니 자신은 그 얘기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까닭은 어차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저도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량학살 얘기는 성서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그 얘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읽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시킨 일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얘기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걸 실제 벌어진 일로 여기든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로 여기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믿었고 왜 그 얘기를 적어서 후대에 전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성을 불결하다고 비하하는 얘기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대량학살에 대한 얘기들도 마치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겠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성서가, 그리고 교회가 2천 년 동안 여성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그렇게 대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임해야 할 겁니다. 여러분이 깜짝 놀랄 정도로 기가 막힌 얘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던 사람들이 여자에 대해서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나 하며 놀랄 겁니다. 하지만 한 번을 겪어야 할 일이므로 이번에 제대로 다뤄보겠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