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4일 주일 설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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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Date
2016-09-15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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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4일 / 성령강림절 열일곱 번째 주일

제가 대체 뭐라고...
시편 8:1-9

곽건용 목사

다윗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맘에 드셨을까?

책을 쓰려고, 또 이번 설교를 하려고 다윗에 대해서 꽤 많은 글을 읽었고 생각도 많이 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직 그 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서 상당히 실망했는데 저명한 유대교 랍비들마 저 “다윗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조금 안도하긴 했습니다. 저만 그를 이해하 지 못하는 게 아니라니 말입니다. 언젠가도 언급한 적 있는 영문학자 헤럴드 블룸은 “야훼는 다윗과 사랑에 빠진 신이다.” (YHWH is the God who fell in love with David)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다윗은 야 훼를 자기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 인물이란 얘기가 됩니다. 물론 그리스 신화가 아닌 구약성서에서 어떻게 하느님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 겠습니까. 다만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야훼가 다윗을 그처럼 무조건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할 이유가 없는데 그렇 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니 말입니다.

성서는 다윗을 가리켜 ‘겉모습 아닌 중심을 보는 야훼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야훼 하느님을 ‘사람의 겉모습 이 아닌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는 말과 다윗을 가리켜 ‘야훼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각각 다른 데 나오지만 이들이 모 두 다윗에 대한 표현이므로 둘을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도대체 다윗의 어떤 면이 사람을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는 야훼의 마음 에 합했을까요? 다윗 이야기를 다 읽어봐도 그가 야훼에게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할까요? 제게 알려주십시오.’라고 물었던 적 이 별로 없습니다. 있어봐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는 주어진 전통이나 원칙을 따르거나 하느님의 뜻을 묻기보다 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했습니다. 이런 그의 행동은 그럴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래도 되는데 그때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 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린 결정들이 모두 야훼의 뜻에 맞았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겁니 다. 그는 큰 잘못을 적어도 두 번 저질렀는데 인생의 전성기에 밧세바와 저지른 불륜과 말년에 인구조사를 한 게 바로 그것입니 다. 두 번째 잘못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것이 왜 그리 큰 잘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사 무엘하 24장 1절에 의하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에 진노할 일이 있어서 다윗으로 인구조사를 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구조 사로 인해 초래된 참사는 다윗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걸 따질 여유가 없으니 그냥 지나가겠 습니다. 좌우간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돌아 무려 7만 명이 죽었고 첫 번째 잘못으로 인해 칼부림이 다윗의 집안 을 떠나지 않아서 자식들이 여럿 죽었습니다. 이 두 잘못만 해도 그가 이룬 업적을 많이 깎아 먹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다윗을 끝까지 후원했고 그에게서 은총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으니 이를 ‘사랑에 빠졌다’라는 말이 아니면 어떻 게 설명하겠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구약성서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을 한 사람만 들라고 하면 사울 왕을 들어야 할 겁니다. 그는 야훼의 선택을 받아 왕이 됐지 만 곧 그보다 야훼의 마음에 더 합한 사람이 나타나자 그는 야훼에게 내쳐집니다.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게 다름 아 닌 다윗 때문이란 걸 알게 되자 그는 다윗을 죽여서 왕좌도 유지하고 야훼의 사랑도 되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의 계획은 실 패로 돌아갔고 그는 전쟁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울이 뭘 그리 크게 잘못했을까요? 어느 정도 객관적인 눈으로 사울 얘기 를 읽는다면 그가 그런 비극의 인물이 될 만큼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비극은 그 자신에게 이유가 있 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만일 그가 다윗과 다른 시대를 살았다면 훨씬 더 행복 하게 살았을 겁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의미가 없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말입니다.

이에 비하면 다윗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는 바라는 모든 걸 얻었 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복된 삶이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자식들 많고 천수(天壽)를 누리고 살다가 자손들에 둘러싸여 평안히 눈감는 것 이었습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다윗은 자식들 간에 벌어진 분쟁만 제외하면 복 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권력과 부는 말할 것도 없 고 여러 명의 부인에게서 많은 자식을 낳았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사울과는 달리 왕위를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고 눈을 감았으니 말입 니다. 이만하면 행복한 인생 아닙니까? 물론 ‘힘 있고 돈 많으면 뭐 하나, 자식들이 그 모양인데....’ 하며 혀를 찰 사람 도 있을 겁니다. 자식이 죽으면 땅에 안 묻고 가슴이 묻는다는데 다윗에게는 죽은 자식들을 다 묻은 가슴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밧 세바와 불륜을 저질러 낳아 엿새 만에 죽은 이름도 없는 아들, 다말을 강간했다가 압살롬에게 죽은 암논, 이복오라비에게 강간당 한 후 무대에서 사라져 죽은 듯 살았던 다말, 아버지에게 반역했다가 요압에게 살해된 압살롬 등을 다 묻은 가슴이 다윗에게 있었겠습 니까. 자식 하나 묻기도 모자른데 말입니다. 게다가 다윗 사후지만 솔로몬에게 죽임 당한 아도니야도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그 가 누릴 것 다 누려서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누구보다 더 불행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따져보면 이런 자식들의 모습 이 모두 다윗에게서 발견됩니다. 암논의 성적인 욕망, 다말의 임기응변, 압살롬의 간교함 모두가 다윗의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으 니 말입니다. 제 인격 안에 들어 있는 요소들이 제 아이들에게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저도 아버지로서 소름이 확 끼쳤습니 다.

근대적 개인의 삶을 구현한 다윗

서구 역사에서 한 명의 사람이 집단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지닌 한 사람의 개인으 로 인정되기 시작한 때는 근대 이후라고 말들 합니다. 역사 연구자들도 민족이나 인종, 계급의 역사뿐 아니라 한 개인의 역사를 중시 하고 거기에 집중하게 된 때도 근대 이후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 이야기를 보면 그 말이 정말 맞나 싶습니다. 구약성서에서 다윗 은 한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개인으로 다뤄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다윗은 전형적인 인물, 곧 뭔가를 가르치려 는 의도가 짙은 ‘모델’로서의 인물 또는 한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한 개인의 인생역정에 초점을 맞춰서 서술 된 최초의 인물입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다윗은 근대 이전에 근대 인물상을 구현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 서 주어진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거나 거기 기대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책임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는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이 자유와 책임을 가치를 실현하는 데 쓰지 않고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썼습니 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추구하고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 라고 믿습니다. 나는 내가 추구하고 이뤄야 할 가치가 있고 여러분은 각자가 추구하고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 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이 각자에게 주신 미션이라고 믿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서 자기가 추구할 가치 가 뭔지를 깨닫고 추구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할 점은 이 가치를 나의 욕구와 혼동하 는 일입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마땅히 이뤄야 할 가치를 내가 뭔가를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 하는 욕망과 혼동한다는 겁니다. 이렇 게 되면 ‘우리’라고 하는 ‘공동선’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라고 하는 개인만 남습니다. 내 욕망을 채우는 일을 가치를 실현하 는 걸로 착각한다는 겁니다.

노예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노예로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 곧 누군가의 주 인이 되는 걸 뜻하지는 않습니다. 비굴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비굴하게 살고 싶어 하지 않지요. 하지 만 그것이 곧 누군가에게 위세를 부리며 사는 걸 뜻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유하게 산다는 것이 곧 누군가를 가난하게 만드 는 걸 의미하지도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곧 누군가에게 패배감을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명예롭게 산다는 것이 곧 누군가 에게 수치를 안겨주는 것도 아니고요.

노예로 살지 않으면서 남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남도 노예 아닌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비굴하지 않게 살면서 남에게 위 세부리지 않고 섬기며 사는 것, 부유하게 살면서 남도 같이 부유하게 살도록 돕는 것, 승리하며 명예롭게 살면서 남에게 패배감이 나 수치를 안겨주지 않고 함께 승리하고 명예롭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려고만 하면 길이 있습니다. 왜 길이 없겠습니까. 우리 주 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깊이 묵상하고 배우고 실천하면서 예수님처럼 사 는 길을 택하면 됩니다. 저는 이 길이 쉽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길은 아직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길과 상당히 다르기 때 문에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고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연습을 계속 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스스로 그 길에 들 어서 있음을 깨닫게 될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게 하려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오늘 우리는 시편 8편을 읽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방금 얘기한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이 시편에서도 봅니다. 이 시편 의 시인은 “야훼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야훼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야훼께 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야훼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야훼께서는 그를 하느님보다 조금 못하 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야훼께서 그토록 생각하시 고 마음을 써주시는가 말입니다. 대체 사람이 뭐라고! 사람이 어떤 존재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하느님보다 조금 못 하게 만드셨고 그에게 존귀와 영화의 왕관을 씌워 주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사람에 대해서 이만큼 찬사한 시편이 이것 말고 또 있 을까 싶습니다.

개신교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최고의 피조물인 사람의 가치를 낮게 평가해왔습니다. 이른바 ‘원죄’를 지은 이후로 사람은 스스로 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요 만물의 찌꺼기만도 못한 존재이며 스스로는 회개도 못하는 죄인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성서 에 사람을 이렇게 볼 만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크게 실수하는 점은 창세기 1장과 시편 8편 등 이 사람을 얼마나 위대한 존재, 보석 같은 존재, 하느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존재요 하느님보다 겨우 조금 못하게 창조된 존재로 서 하느님께서 존귀와 영화의 왕관을 씌워 주신 존재인지를 간과하는 점입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차이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분노하고 심판하시는 하느님인데 반해서 신 약성서의 하느님은 예수님의 하느님으로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 겁니다. 이 구별은 상당히 오래 됐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악한 물질세상을 만든 신이 예수님의 하느님일 수 없다면 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에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옳 지 않습니다. 이 주장은 적어도 구약성서를 너무 피상적으로 읽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관통하는 커다란 맥 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맥은 ‘성육신’과 ‘신화’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신화는 신화(神話)가 아니라 신화(神 化)를 가리킵니다. 곧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서는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사람이 신이 되려는 모든 시도를 가장 큰 죄악이라고 봅니다. 야훼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 라거나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도 모두 사람이 신처럼 되어 신을 컨트롤하려는 시도를 금하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데 신약성서에 와서 하느님은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겁니다.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의 모든 시도 를 가장 큰 죄악으로 단죄하신 하느님이 스스로 사람이 되셨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가장 큰 신비가 있습니다. 왜 사람이 하느님이 되려는 것을 극구 금지했던 하느 님이 스스로 사람이 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사 람이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하느님이 되는 것을 하느님은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셔야 하 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셔야 하는 일이고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길은?

하느님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려는 시도를 절대 용납하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 사람에 대 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신 겁니다. 자, 이렇게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게 하려고 하 느님은 스스로 사람이 되셨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게 하려고 하느 님은 스스로 사람이 되시기까지 했는데 사람은 그냥 가만히 주는 떡이나 받아먹으면 되는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도 하느님 처럼 되려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되는 것’(being human)이고 비인간적인 삶의 현실을 인간화 (humanization)하는 일입니다. 위에서 사용한 표현으로는 각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자기의 욕 망과 혼동하지 말고 추구하는 일입니다. 노예로 살지 않겠다면서 남의 주인이 되려 하지 말고 남도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비굴하 지 않게 살겠다고 남에게 위세부리지 말고 섬기며 사는 것, 부유하게 살면서 남도 같이 부유하게 살도록 돕는 것, 승리하며 명예롭 게 살면서 남에게 패배감이나 수치를 안겨주지 않고 함께 승리하고 명예롭게 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 되는 길이고 인간화하 는 길입니다.

다윗은 안타깝게도 이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배울 점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그를 반면 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하느님에게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복이 물질이 나 권력이나 다산(多産)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그런 것들 을 복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복을 ‘사람이 각각 실현해야 할 가치를 실현하 는 데 있어서 장애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정의해봤습니다. 어떤가요? 일리가 있는 정의입니까?

다윗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그의 성격만큼이나 복잡합니다. 좌우간 그는 한 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풍운아였습니다. 그의 공과를 따져서 이어받을 것은 이어받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일은 우리의 몫일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