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5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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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Date
2016-09-2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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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5일 / 성령강림절 스무 번째 주일

다 아시는 분께 드리는 기도
마태 6:5-8

곽건용 목사

기도는 하느님과의 소통

기도가 뭘까요?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기도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럴듯하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뭔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뭐든지 정의를 내리려 합니다. ‘그게 뭔데?’라는 질문이 바로 그런 시도입니다. 그런데 정의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정의하기는 했는데, 그 정의가 맞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여기 속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도는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멀리 나아가지 못 하고 제자리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 답을 찾는 과정에 이미 꽤 멀리 가 있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기도’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제가 하는 말이 옳다거나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이렇게 하면 안 된다거나,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제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기도에 대한 영원불변한 절대 진리를 말한다고 들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기도에 대해서 하는 얘기도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좋은’ 질문이므로 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이미 꽤 멀리 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우리가 하는 기도를 ‘듣는’ 혹은 ‘듣는다고 믿어지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정말 기도를 들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듣는다’는 말이 뭘 뜻할까요? 어떻게 하는 게 듣는 겁니까? 우리가 하느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소통’입니다. 기도가 소통이란 말은 곧 그것은 두 인격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란 뜻입니다. 기도는 허공에 대고 하는 것도 아니고 비인격적인 어떤 기운이나 에너지를 향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두 인격체 간의 만남이고 소통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하느님은 결코 (삼인칭의) ‘그’가 될 수 없는 (이인칭의) ‘당신’이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삼인칭의 ‘그’ 또는 ‘그녀’라는 말을 씁니다. 어떤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삼인칭의 ‘그’라고 부르지 않고 이인칭의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당신’이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불렀다가는 어디 감히 건방지게 하느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냐고 혼났습니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법에 따르면 어르신을 ‘당신’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어법에 어긋나는 동시에 건방짐을 무릅쓰고 하느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느님은 제삼자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이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이렇듯 이인칭의 ‘당신’인 하느님과의 소통은 일방향의 소통이 아닌 양방향의 소통입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기만 하고 가지는 않거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만 하고 오지는 않는 일방향의 소통이 아니라 양쪽에서 오고가는 양방향의 소통이란 얘기입니다. 기도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느님에게 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하느님이 하고 싶으신 얘기를 내가 듣는 일입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컷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그게 끝나면 바로 짐 싸갖고 가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들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을 듣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침묵할 때 가장 잘 들립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침묵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가운데 침묵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침묵하는 시간은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집니다. 현대인은 온갖 소리들 속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침묵의 소리나 침묵 가운데 울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는 정해져 있습니다. 소리가 너무 커도 못 듣고 너무 작아도 못 듣습니다. 우리는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가청영역을 벗어난 큰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데 강아지는 듣고 귀를 쫑긋하는 경우가 있지요. 이 역시 우리의 가청영역을 벗어난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소음이 많은 낮에는 안 들렸는데 깊은 밤이 되어 사방이 조용해지면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조용해지면 들리는 소리, 침묵하면 들리는 소리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평소에는 우리 가청영역 바깥에 있지만 우리가 침묵하면 들리는 소리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묵해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야훼의 선지자들을 다 죽었다고 믿고 좌절해서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쳤을 때 하느님은 그에게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작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이 애기는 침묵 가운데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기도는 플리바겐(flea bargain) 용이 아니다

다음으로 명심할 점은, 기도는 공적(功績)이나 미덕(美德)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저 권사님은 기도 많이 하는 분이야’라거나 ‘저 목사님은 기도의 종이야...’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도를 그리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은 괜히 스스로 작아지고 움츠려들기 마련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도는 남에게 자랑할 선행이나 내세울만한 미덕이 아닙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기도가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의무로 하는 것도 아니고 덕을 쌓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그걸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하면 살 수가 없이 절박하기 때문에 합니다.

‘플리바겐(flea bargai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범죄자가 자기가 아는 다른 범죄에 대한 정보를 경찰에게 건내주면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일부 또는 전부를 눈감아주는 것을 플리바겐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기도는 플리바겐 같은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잘못이 상쇄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가 남에게 내세우는 게 아니란 점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대들은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그대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그대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대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마십시오.

당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위선자처럼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큰길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려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숨어 계시면서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다음에 하신 말씀, “하느님 그대들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이 구하기 전에 그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라는 말씀은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뭔지 다 알고 계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느님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구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누가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구구절절 얘기하면 신경질 나지요? 하느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다 아는 걸 중언부언 말하면 그걸 들어주기는커녕 신경질을 내시지 않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느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다 알고 있다고 했지, 우리가 ‘구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둘 사이에는 상당히 큰 간격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곽건용이 기도하기 전에 곽건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는 얘기지, 하느님이 독심술(讀心術)을 사용해서 곽건용이 입을 열기도 전에 곽건용이 기도하려는 내용이 뭔지 아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구하는 것과 내게 필요한 것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통용되는 수단인 힘이나 권력이나 지식 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이용해서 더 쉽게, 더 빨리 얻으려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기도는 빈털터리끼리 만나는 사랑의 관계

저는 ‘수준’이니 ‘단계’니 하는 것을 얘기하기 싫어하지만 이 경우에는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얘기하겠습니다. 기도에는 세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구하는(ask) 기도와 내게 필요한 것(need)으로서의 기도, 그리고 내가 갈망하는 것(desire)으로서의 기도가 그것입니다. 구하는 것으로서의 기도는 내가 욕망하는 것, 가졌으면 하는 것을 바라는 겁니다. 필요한 것으로서의 기도는 오늘 읽은 예수님 말씀처럼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내게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실까를 따져보는 겁니다. 기도는 생각을 멈추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사고하기를 멈추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깊이 사색하고 숙고하면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입장에 서보기도 하면서 하는 게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갈망으로서의 기도는 바라는 것 없이 그냥 for nothing, 무조건적으로 unconditionally, 이유도 없고 without reason 목적도 없이 without purpose 그냥 하느님을 바라는 겁니다. 필요 때문에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겁니다.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갈망으로서의 기도는 필요해서 하느님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느님이 좋아서 하느님과 소통하는 걸 가리킵니다. 쓸모가 있어서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므로 하느님을 쓸모없는 분으로 여기는 기도가 바로 갈망으로서의 기도인 겁니다. 이게 가능하냐고요? 가능 여부는 차치하고 바람직하냐고요? 이 점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기도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합니다.

욕망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뭘 갖고 있고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합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과 ‘소유’의 ‘능력’이 나의 ‘없음’과 ‘필요’와 ‘무능’을 채워줄 거라고 믿지요. 존재하고 많은 것 갖고 있으며 전능한 하느님이 기도를 통해서 보잘것없고 빈곤하고 무능한 나를 채워준다고 믿는다는 겁니다. 이 세계에서는 너의 ‘있음’이 사라지거나 소멸되면 나는 다른 데로 떠나야 합니다. 욕망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세계를 우리는 ‘사랑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세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세계’가 아닙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나도 없고 너도 없습니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조용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때 일어나는 일은 격렬하지는 않지만 단호합니다. 시끄럽지는 않고 조용하지만 결연합니다. 함께 있을 때만 견딜 수 있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의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더 큰 유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자

마지막으로 파울로 코엘뇨의 글 두 가지를 소개하고 오늘 기도에 대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한 수도원에서 긴 아침기도 시간이 끝나자 신참 수사가 수도원장에게 “기도를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수도원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답 대신 하나 묻겠다. 네 간절한 기도가 내일 아침 해를 뜨게 하겠느냐?” 신참수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해가 뜨는 건 우주의 섭리니까요.” 그러자 수도원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 속에 네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가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에 신참수사가 충격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인즉, 우리의 기도가 쓸모없다는 겁니까?” 그러자 원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 그런 말이 아니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해돋이를 볼 수 없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 늘 계셔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한 수도원장이 기도를 통해서 근심과 번뇌에서 벗어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이 소문을 들고 한 현자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들었느냐, 수도원장 요한이 세속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싸울 상대가 없으면 영혼도 약해지는 법, 그러니 우리 모두 수도원장에게 강한 유혹을 내려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가 유혹을 물리치면 더 큰 유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자. 그가 그 유혹을 이겨내면 그가 ‘주여, 제게서 사탄을 물리쳐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신 ‘주여, 게게 악을 물리칠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