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8일 주일 설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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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5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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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8일 / 성령강림절 열여섯 번째 주일

시방 뭣이 중헌디?
사무엘하 7:25-29

곽건용 목사

다윗은 다중인격장애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살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몇 개의 부류로 나누는 일은 쉽 지 않고 또 어리석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누구나 사람을 몇 개의 부류로 나누곤 합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면 쉽게 성격이 파악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몇 번 만나지 않아도 성격이 쉽게 파악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오래 알고 지내도 성격 파악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이 공존하는 정신병을 ‘다중인격장 애’(multi-personal disorder) 또는 ‘해리성정체성장애’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고 부릅니다. 소설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대표적이고 드라마로 는 <킬미 힐미>에서 배우 지성 씨가 연기한 인물이 대표적인 다중인격장애자입니다. 저는 이번에 다윗 이야기를 읽으면 서 혹시 다윗이 다중인격장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성격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공존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 았다는 얘기입니다.

승승장구하던 다윗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계기는 밧세바와의 불륜사건이었다고 얘기들 합니다. 그 전에도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 망 다녔으므로 평탄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느님이 그를 지켜줬다고 했고 또 그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위험에 서 벗어났으며 차근차근 왕좌에 접근했습니다. 결국 그는 남쪽 지파연합체인 유다와 북쪽 지파연합체인 이스라엘의 왕이 됐습니다. 게다 가 주변나라들을 정복하는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어 그는 직접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나라가 안정됐고 세력도 상당 정도 확 장했습니다. 이때 그는 밧세바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걸 감추려고 심복 요압을 시켜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격전지로 보내서 죽였습니 다. 다윗은 비록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우리야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 러 온 전령에게 그는 요압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너는 요압에게 칼은 이편도 죽이고 저편도 죽이기 마련이니 이런 일 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라”(사무엘하 11:25).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흔히 벌어지는 일이니 우리야가 죽었다고 해 서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왕의 명령을 수행했다고는 하지만 요압이 행여 양심의 가책 같은 걸 느낄까봐 그를 안심시켰 던 겁니다. 참으로 악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그렇지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말입니다. 이러니 다윗 이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행위에는 거기에 따르는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필귀정 말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우리야를 살해 한 일 때문에 예언자 나단에게 혹독한 꾸중을 들었습니다. 다윗은 곧바로 참회했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가볍게 여긴 죄의 대가는 피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밧세바와의 불륜의 결과로 태어날 아기가 죽는 일과 다윗 집안에서 영영 칼부림이 떠나지 않는 일이었습니 다. 나단의 예언대로 이루어져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이름도 갖기 전에 죽었고 다윗의 장자 암논은 이복동생 다말을 강간했다가 역시 이 복동생 압살롬에게 살해당했으며 압살롬은 아버지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습니다. 그뿐입니까, 다윗이 늙어 죽을 때가 되자 아도 니야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가 솔로몬에 의해 죽었습니다. 아기의 죽음과 남매간의 강간, 그리고 거듭되는 형제살인 등, 이 모든 비 극적인 사건들이 한 집안에서 벌어졌으니 과연 다윗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는 자식이 한 명도 아니고 여 러 명이 서로 죽고 죽이는 걸 자기 눈으로 봐야 했으니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시초는 밧세바와 저지른 불륜이었다는 겁니다.

비극의 시초는 성전 건축 계획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비극의 시초는 불륜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싹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비극은 다윗이 야 훼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싹텄습니다. 다윗은 야훼 하느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은 다음에 하느 님의 성전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나단에게 자기 계획을 얘기했습니다. 자기는 백향목으로 지은 화려한 왕궁에 사는데 야훼의 궤는 아직 도 초라한 천막 안에 있다면서 야훼를 위해서 성전을 짓겠다고 말입니다. 이에 나단은 야훼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니 무슨 일이든 하라 고 조언했습니다. 왜 나단이 이런 중차대한 일을 야훼께 묻지도 않고 대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확신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요? 하지만 그 날 밤에 야훼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서 다윗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 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내가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달라고 하더냐? 이 제 너는 다윗에게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 은 것은 바로 나다.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어서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쳐 주었다 나는 이제 네 이 름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과 같이 빛나게 해주겠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제사장에게 거짓말을 해서 먹어서는 안 됐던 야훼께 바쳐진 빵까지 얻어먹은 사람 아닙니까. 또한 부하 가 목숨을 걸고 구해온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었던 사람 아닙니까.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지켰던 전통과 금기를 거리낌 없 이 뛰어넘은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이런 그가 지금 야훼 하느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모세의 인도를 받아 탈출해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했 던 이스라엘 백성의 야훼 종교는 움직이는 신, 이동하는 신, 유목의 신을 믿는 종교였습니다. 이는 붙박이 성전 안에 정주하는 신과 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움직이는 신은 자유의 신입니다. 절대 자유의 신입니다.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정되지 않 은 신입니다. 반면 붙박이 성전의 신은 고정된 신이고 법칙의 신이고 전통의 신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 이 천막에 계셨던 것은 그분의 자유의 표현이었습니다. 야훼게서 그 누구에게도 집을 지어달라고 하시지 않은 이유는 편안함이나 화려함 과는 무관한 신학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야훼를 위해 집을 짓겠답니다. 그는 자기는 화려한 궁에 사는데 야훼의 궤 는 초라한 천막에 있다는 이유로 성전을 짓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신학적인 반역이요 쿠데타였습니다.

경건한 신앙인가 정치 이데올로기인가?

그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거리낌 없이 그걸 저질렀겠지만 그 때문 에 나단에게 혼이 났고 엄청난 비극을 겪었습니다. 반면 야훼를 위해 성전을 짓겠다는 나름 ‘기특한’ 계획은 야훼에 의해 단번에 거 부됐습니다. 그는 자기 욕구를 채우려기 위해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대개가 그렇지요. 그렇다면 성전 건축은 어떻습니까? 그런 생각 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을까요? 경건한 신앙심에서 비롯됐을까요? 정말 자기는 화려한 궁전에서 사는데 야훼의 궤는 초라한 천막에 있 는 것이 그렇게 송구했을까요? 혹시 아직은 완전히 안정되지 않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종교를 활용할 생각은 아니었을까요? 이 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현존(presence)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새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 갖다 놓은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붙박 이 성전을 지어 야훼의 영원한 거처로 만들어 그걸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오늘 읽은 말씀은 나단의 말 을 들은 후 다윗이 야훼께 바친 기도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모범적인 기도로 여기지만 그 내용을 잘 읽어보면 결국 자신 과 자기의 후손에 복을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그가 의도적으로 야훼 종교를 권력 강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책을 쓰려고 다윗 이야기 를 공부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 각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와 같은 정치적 욕망은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서 그조차도 그걸 의식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영혼 깊은 데 그런 욕망이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 다.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허위의식’이라고 불러도 좋겠고 ‘가짜 믿음’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위선’이라고는 생각하 지 않습니다. 다만 영혼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가짜 믿음을 다윗이 인식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은 ‘가치’를 스스로 선택하고 그걸 위해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 가치를 상기시키는 것이 양심 의 목소리이고 신앙의 음성입니다. 어떤 사람이 순전히 이기적인 행복을 거부하고 양심과 신앙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양심과 신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 람들은 이 가치와 자신의 욕망을 혼동합니다. 가치를 욕망으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고 욕망을 가치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 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을 지으려는 계획은 그의 가치의 표현이었을까요, 아니면 욕망의 표현이었을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아직 할 얘기가 많지만 다윗 이야기를 갖고 하는 설교는 다음 주일로 마무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