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1일 주일 설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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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5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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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1일 / 성령강림절 열다섯 번째 주일

새로운 인간? 본래의 인간?
사무엘하 23:14-17

곽건용 목사

전통주의자이며 동시에 혁신가인 다윗

지난 주일에 대강이나마 다윗의 일생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때문에 설교가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다윗을 한 마디로 어떻 게 표현할지를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지난주일 설교 제목처럼 그에게는 혁명가 또는 혁신가의 면모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 서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혁신이나 혁명을 하나 보다 하면 이스라엘의 전통으로 회귀하고, 전통 을 수호하나 보다 하면 그것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모습을 그는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가 매우 애매합니다. 어 떤 사람은 그를 ‘문제적 인간’이라고 불렀던데 저는 이것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습니다. ‘~적’이란 표현이 맘에 들지 는 않지만 말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능멸하는 말을 내뱉는 걸 보고 분기탱천해서 그 의 대결을 자청했습니다. 그는 골리앗의 모욕적인 연설과 행위에 분노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모욕하는 말을 듣고 도 두려워 떨고만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에 대해서도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겁니다. 그를 움직인 것 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모욕하는 데 대한 분노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인 걸 보면 다윗은 누구보다 더 이스라엘의 신앙전통 에 충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경우가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를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 은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유랑할 때 야훼의 명령을 받아서 만든 것으로서 야훼 하 느님이 거기에 계시다고 믿었던 성물(聖物)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신앙전통에 얼마나 충실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그 는 전쟁에 나갈 때 야훼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 또한 이스라엘의 신앙전통을 존중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다윗 은 밧세바와의 불륜 및 우리야 살인을 꾸짖은 예언자 나단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참회했습니다. 그가 나단을 야훼의 뜻을 전하 는 예언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야훼 하느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화려한 왕궁에 사는데 예 루살렘으로 옮겨온 야훼의 궤는 초라한 천막에 둔 것이 송구스럽다면서 그는 나단에게 성전 지을 계획을 밝힙니다. 나단은 그의 말 을 듣고 처음엔 주저 없이 동의했지만 그날 밤 야훼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성전을 짓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분명 히 밝히지도 않고 말입니다. 날이 밝자 나단은 야훼의 메시지를 다윗에게 전했고 다윗은 이에 순종해서 성전 건축을 포기합니다. 이 럴 때 다윗은 어른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신앙전통에 충실한 경건한 신앙인 이미지 로 후대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윗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다윗에게는 이와 다른 면모가 있습니다. 그가 혼자서 사울 을 피해 도망치다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해서 야훼께 바쳐졌던 음식을 얻어먹었다는 얘기,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 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가 야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란 이유로 죽이지 않았다는 얘기, 마지막으로 전투 중에 극심한 갈증을 느껴 서 부하더러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가 정작 부하들이 적의 포위를 뚫고 물을 가져오자 마시지 않고 땅바닥에 부은 얘기를 읽었습니다.

다윗이 야훼께 드려졌던 빵을 거짓말을 해서 얻어먹은 얘기는 예수께서 인용하신 적이 있어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제 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걸 갖고 바리새인들이 트집 잡자 예수님이 이 에피소드를 인용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사울 을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준 얘기와 부하가 목숨 걸고 구해온 물을 바닥에 쏟은 얘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 이 누군지 알려면, 성서가 다윗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뭔지 알려면 이 얘기들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만족하셨을까?

다윗은 누구입니까?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분명히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이 점은 부인 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이와 같은 그의 독특한 행동은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미쳐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 한 의식을 갖고 나름대로 확고한 사상에 근거해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엇 때문에, 뭘 믿고 그렇게 행동했을까 요?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창세기에 전해지는 인간 창조에 대한 이야기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런지 이 제부터 따져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엿새 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인 엿새째 날에는 인간을 창조하셨지요. 인간 창조 는 그 방법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의 경우와 다릅니다. 여타의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 씀하시면 빛이 창조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창조 와 여타 피조물의 창조는 그 방법이 다릅니다. 인간 창조의 방법이 어딘지 특별해 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인간을 만물 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물론 인간을 그렇게 부르는 건 인간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과 모습대로 창조하셨다는 진실 못지않게 중요한 진실은 하느님께서 엿새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신 다 음에 ‘쉬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이레째 되는 날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이 안식 일이 됐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창조 후에 하느님이 쉬셨다고 하는 대목에 초점 을 맞춰왔습니다. 곧 이레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지정하셨고 그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는 데 집중해왔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하느님이 쉬신 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였다는 사실입니 다. 인간 창조에는 여타의 만물의 창조와는 다른 두 가지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느님께서 여타 피조물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 에 좋았다’고 했던 데 반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매우’라는 말이 갖 고 있는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려면 ‘매우 매우’ 또는 ‘엄청나게’라고 번역해야 할 겁니다. 곧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말 할 수 없이 좋아하셨고 만족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느님은 왜 그렇게 좋아하셨을까요? 사람 어디가 어떻게 마음이 들 어서 그토록 좋아하셨는가 말입니다. 얼굴이 아주 잘 생겼고 늘씬해서?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럼 뭘까요? 문맥 을 보면 하느님은 사람에게서 하느님과 더불어 창조행위를 계속해나갈 동반자를 봤기 때문입니다.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느냐고요? 다시 말하지만 하느님이 엿새째 되는 날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이레째 되는 날 쉬셨습니 다. 하느님은 그 날 왜 쉬셨을까요? 창조하시느라 너무 피곤하셔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하느님이 뭔가를 하시고 고단해 서 쉬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럼 더 이상 창조할 게 없어서 쉬셨을까요? 그것도 천만에 말씀입니다. 지금도 창조 는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새로운 생명이 계속 태어나고 있으니 창조가 완료됐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창 조하신 다음 이레째 되는 날 쉬신 것은 이젠 창조의 동반자인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홀로 창조하셨지만 이제부터 는 인간과 더불어 창조행위를 계속하실 수 있게 되어 쉬셨던 겁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아하셨고 쉬셨던 까닭이 바 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창조 때 실제로 일어났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를 어떻게 이해하 는지, 또 스스로를 누구라고 이해하는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동반자를 만들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무신론자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왜 무신론자인지 를 이해해 보려 하진 않고 말입니다. 이들은 왜 무신론자일까요? 그 이유는 물론 각자 다르겠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하느 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그런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은 존재라고 유신론자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면 사람 은 하느님에게 매어 있는 존재일 뿐,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신론자들이 하느님을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 다. 사람을 속박하는 신은 싫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들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그렇게 자유롭지 않은가요? 사실 우리는 우리들 맘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 로 결정하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하느님 때문에 여러분 맘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못했던 적 있는 분 있 습니까? 나는 왼쪽으로 가려하는데 하느님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른쪽으로 끌고 가신 적 있는 분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겁니 다. 하느님이 오른쪽으로 끌고 가려는데 그 말은 안 듣고 왼쪽으로 갔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 이 자유롭기 않다는 얘기는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창세기가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아주 좋다’ 하셨고 그 다 음에 쉬셨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하느님이 창조를 사람에게 최소한 일정 부분 위임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 셨다는 뜻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위임하셨거나 사람을 창조의 동반자로 삼으셨던 겁니다. 곧 하느님이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셨다 는 뜻이고 또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신뢰’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랑’ 은 좀 뜬금없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오늘은 그 얘기를 할 시간이 없네요. 다윗 이야기를 설교하는 동안에 그에 대해 얘 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인간은 본래 이런 존재였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해 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좋아하셨던 존재, 그래 서 창조사역의 상당부분을 믿고 위임할 수 있었던 존재였던 겁니다. 사람에 대해서 이와 같은 전제를 갖고 다윗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 다. 그렇다면 다윗은 창세기 1장이 말하는 사람의 본성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상당히 낯설 겁니 다. 그 동안 교회에서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그의 피조성과 수동성, 하느님에 대한 복종의 의무 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왔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의 사람 창조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창세기 1장에 표현되어 있는 사람 창조의 사상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 다. 그는 거침이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거침이 없다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는 믿어지는 것은 믿었고, 믿어지지 않은 것 은 과감하게 안 믿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고 싶은 것은 믿었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 듯이 말입니다. 믿음이란 게 어떻게 억지로 되겠습니까. 사람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지 못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 겠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믿지도 않는데 믿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는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사람 본래의 모습을 다윗에게서 본다

저는 다윗 이야기를 읽으면서 ‘욕심’과 ‘두려움’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 려 했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자격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하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으니 그보다 더 유리한 자격은 있을 수 없겠지 요.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선택과 약속을 믿고 수동적으로 그게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능동적으로 왕 이 될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해나갔습니다. 필요한 조치를 취했고 걸림돌을 치웠습니다. 그는 욕심 많은 사람이지 만 그 욕심을 하느님의 힘을 빌려서 채우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는 굳이 비교하자면 야곱과 비슷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 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때로 그는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 예를 들려면 많 이 들 수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예는 밧세바와의 간음이 되겠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걸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 야 할까요? 물론 이런 태도는 위험합니다. 선을 넘어가기 일쑤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경우는 하느님의 힘을 빌려 욕심을 채우 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를 믿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신뢰한다는 걸 믿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저 위에 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계신지, 나를 위해 무슨 일을 준비하고 계신가, 행복인지 불행인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따위를 계산하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불리한 일을 계획하지 마시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분명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에게는 다 른 길이 없습니다. 이 ‘위험한’ 길을 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윗은 오늘 읽은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이 모습을 잘 보여줬습니다. 그가 갈증으로 인해 부하에게 물을 가져 오라고 명령한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 흔히 하는 행위였습니다. 남다를 것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는 부하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물 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었습니다. 이 행위는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제사행위였던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다윗의 이 행위를 속임수 로 이해했습니다. 부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부하들 앞에서 위선을 떨었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 다. 다윗은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는 하느님의 신뢰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바탕으로 모 든 일을 스스로 결단했던 사람인 겁니다. 물론 그의 결정이 모두 옳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는 잘못된 결정을 했습니다. 하 지만 그는 그래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결정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입니 다.

이런 다윗에 비춰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인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대한 하느님의 신뢰 를 믿습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여하신 자유를 만끽하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를 오해할 여지가 많 고 하느님이 부여하신 자유는 오남용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오해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 다. 하느님의 창조사역의 동반자로 말입니다. 다윗 이야기에 대한 설교는 다음주일에 이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