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3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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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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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3일 / 성령강림주일 스물일곱 번째 주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3
곽건용 목사
지난 몇 주간 놀랐던 일들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깜짝 놀라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할까요? 터무니없는 질문이지요? 그게 몇 번인지 셀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요즘 하도 놀라는 일이 많다보니 해보는 질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얘기했듯이 이번 고국방문 때 열 몇 시간 비행기 여행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니까 세상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동안 흉흉한 소문으로만 돌아다니면 무속적이고 주술적인 얘기들이 하나하나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주말에 청계광장에서 집회가 있었고 그 다음 주간은 두 시간이 멀다 하고 새로운 뉴스가 전해지더니 지지난 토요일에 고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과 노제가 20만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1백만 명의 시민들이 광화문과 서울광장을 비롯해서 시내 곳곳을 가득 메운 가운데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멀었지만 이 열기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새로운 시대를 열 희망을 강하게 갖게 됐습니다.
이 와중에 세계 어느 나라 선거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미국 선거가 지난 주중에 있었습니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대통령선거였는데 결과는 예상외로 공화당의 도날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그 사람이 선출되지는 않겠지...’ 했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우리 이민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한 발은 고국에 다른 한 반은 이곳 미국에 들여놓고 살아갑니다. 지금 고국은 9년 가까운 ‘잃어버린 세월’을 청산할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긍정적인 요인들과 부정적인 요인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어제 1백만 명이 모인 총궐기대회는 희망적인 사인이지만 그렇다고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직 대통령은 퇴진할 생각도 안 하고 있고 공권력은 저들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1백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모래알처럼 언제 흩어질지 모릅니다.
고국에서의 변화 이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사건은 트럼프의 당선입니다. 이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원인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글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편을 읽어봤는데 아직은 중구난방입니다. 어느 입장에서 분석하느냐에 따라서, 또 어떤 정책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사로 다른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의 민낯
분명한 사실은 이번 대선이 백인선거이고 인종선거였다는 사실입니다. 트럼프는 백인들의 표를 모으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는 저학력의 가난한 백인 표만 모은 것도, 남성과 노년 백인들만 결집한 것도 아닙니다. 교육수준, 계층, 성별 등과 무관하게 백인 대다수가 그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의 분노와 경제적 소외감을 백인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증오로, 인종적인 분노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는 인종적 편견과 증오를 선거에 이용했던 겁니다.
또 그는 여성혐오를 선거에 이용했습니다. 그는 이를 은밀하게 암시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대놓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힐러리 클린턴보다 더 많은 백인여성들의 표를 모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민자들을 ‘범죄자’요 ‘강간범’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슬림이 미국에 오는 것을 금하겠다고 공언했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고 공언했습니다. 트럼프의 빨간 모자에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것의 실제 의미는 ‘미국을 다시 하얗게(Make America White Again)’였습니다. 트럼프는 인종적 편견과 여성 혐오와 이민자 및 외국인 혐오에 기반을 두고 선거운동을 했는데 압도적인 미국 백인들이 그에게 표를 던졌던 겁니다.
이 와중에 미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백인 복음주의자 대다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섹스와 권력을 추구해온 트럼프라는 사람에게 몰표를 줬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번 선거처럼 종교적인 위선을 보여준 선거는 없었습니다. 제가 널리 알려져 있는 이름이기에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쓰지만 사실상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척 하는, 또는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번 선거에 백인 복음주의자 81%를 포함해서 백인 기독교인들 다수가 그에게 투표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예수의 복음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동성애 이슈가 이번 선거판을 좌우했다는 사실도 매우 놀랍습니다. 이들에게 기독교 복음은 곧 동성애 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동성애에만 반대하면 돈, 섹스, 권력, 위선, 거짓 등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입니다.
선거 때마다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들(거의 100% 백인들)이 목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지난번 선거 때는 릭 워렌 목사가 후보자와 대담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이번엔 그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론대로라면 트럼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이렇게 추측합니다. 그들은 자기 교회의 백인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걸 어떻게든 간파했지만 입을 닫았습니다.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이겠습니다. 그들도 교인들과 같은 생각이었거나 아니면 교인들의 견해를 반대하는 것이 불필요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사람에 대해 침묵했던 겁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인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겁을 먹고 있습니다. 벌써 곳곳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옵니다. 트럼프의 공격 대상이었던 유색인종 자녀, 이민자, 무슬림, 흑인들은 이제 백인들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전에는 그리 두려워하지 않던 백인 이웃들을 ‘혹시 저 사람도 인종 증오자가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갖고 바라봐야 하게 됐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캐나다로 이민이라도 가야 합니까? 트럼프 당선이 확정되기도 전에 캐나다 이민국 홈페이지가 다운됐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제 기분도 그 홈페이지처럼 다운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실망만 하겠습니까. 다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여기서 우리 제자회 교단 전국총무인 샤론 왓킨스 목사님이 교단의 교회에 보낸 메시지를 읽고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왓킨스 목사님의 메시지에서 영감을 받은 얘기입니다.
선거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변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선거 결과에 대해 기뻐했든지 아니면 놀랐고 실망했든지 간에 상관없이 복음은 우리에게 온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급진주의자든지 종교적 소수자든지를 막론하고 우리 이웃은 단 하나,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선거결과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선거결과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되고 외롭고 약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므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 역시 그들 편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이 정부를 책임질 사람들이 누구든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든지, 아무리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든지 말입니다.
이번 캠페인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분열을 야기하는 선거였습니다. 아미 이 파장은 상당히 오래 갈 것입니다. 선거 결과에 기뻐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반대로 이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는 요한일서 4장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오늘 우리의 미션은 어제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일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과 삶으로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공동선을 위해 일하라고 부름 받았고 인종과 나이와 성적지향, 종교와 정치적 지향 등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만찬 식탁으로 초대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선거에서 누가 이겼든지 우리들은 화해를 지향하고 인종적 차별을 없애는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난민들과 이민자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적 소수자들을 환대해야 합니다. 이웃종교인들과 나누고 서로에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정의롭게 살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샬롬을 추구하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잊히거나 잃어버린 자가 없는 공동체를 세우라는 미션을 받았습니다. 정치적 지향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하느님나라가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이 이뤄지도록 우리는 손에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람을 백악관에 보내는 선거가 끝난 뒤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가장 연약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즉 서류미비자, 흑인과 유색인, 무슬림, 성적 소수자 등과 연대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들을 보호해야합니다. 둘째로 피부색이나 종교나 성별, 나이나 성적 취향 등과 무관하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는 예언자의 메시지를 과거보다 더 진실하고 용감하게 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일은 위험한 과제입니다.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들보다 더 위험하고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결과와 무관하게 여러분은 그들과 함께 할 것임을 알려주십시오.
오늘 읽은 히브리서 4장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널리 알려진 구절인데 오늘은 선거 얘기를 길게 하다 보니 이 구절을 자게하게 읽고 해석할 시간은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선언을 한 후에 구약성서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그들 모두가 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살았다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확신’(개역성서는 ‘실상’)이고 ‘증거’라고 말하는데 무엇의 확신이고 무엇의 증거인가 하면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겁니다. 여기서 ‘확신’과 ‘증거’는 서로 대응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따라서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서로 대응하는 것들입니다. 이 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들’은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뭔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하지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들을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해가 떴습니다. 이번 미국선거에서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고 또 그 파장은 상당히 오랫동안 예수의 복음을 살아갈 기독교인들을 힘들게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믿음의 내용이 달라지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약간의 역사적 후퇴는 있을 수 있지만, 역사가 잠시 동안은 갈짓자 걸음을 하겠지만 끝내 앞으로 나아간다는 진실, 그리고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을 오늘 이 땅에서 펼치는 사명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간절히 바라지만 아직은 보이지 않는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의 끈을 굳건히 붙잡고 오늘도 내일도 같은 걸음으로 전진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이번 선거의 결과를 두고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바라고 믿습니다.